조선의 향촌사회 향촌지배와 국가와 사족 그리고 전란 조선초기 향촌지배 16세기 향촌 사족지배 향촌지배 재지세력 양란 직후 향촌상황 양민 확보정책 생산력 복원정책 국가재정 확충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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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의 향촌사회
- 향촌지배와 국가와 사족, 그리고 전란
1. 머리말
2. 조선건국 초기의 향촌지배조직
3. 16세기 향촌 내 사족지배 질서의 강화
1) 향촌 내 재지세력의 변화
2) 16세기 사족지배질서의 강화-16세기의 사회문제와 향촌지배
4. 양란 직후의 향촌상황
5. 양란이후 향촌지배 질서를 위한 대책과 대응
1) 정부의 대책
(1) 양민 확보정책 - 호패법
(2) 생산력 복원정책 - 개간사업과 부세제도의 개
(3) 국가재정 확충정책
2) 사족들의 대응-경재소의 혁파와 향촌지배
6.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은 건국 이후로부터 일원적 체계의 중앙집권을 위해 향촌조직의 정비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세기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자 사족지배체제 등을 내세워 향촌사회를 조직해 나갔다. 또한 16세기 이후로는 점차 확대 되어 가는 지주-전호제라는 생산관계 속에서 향촌사회의 질서는 점차 변화해 나갔다. 그러한 가운데에 왜란과 호란의 경험은 조선에 큰 변화를 야기 시켰다. 이 변화의 최전방에 서있는 곳은 향촌사회의 변화·변동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7세기 양난을 거친 이후 국내외 상황과 관련하여 국가가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국가 재건책을 강력히 추진한 사실이 주목되는데 전란의 직접적인 전장이 되었던 조선에서 생산체계와 대민지배체제의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기존의 지배체제의 붕괴로 인한 동요 속에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등은 향촌질서의 변화를 통해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사회 변동에 대응하여 국가의 향촌지배정잭과 그 실현이라는 접근은 조선후기의 다양한 모습들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향촌지배조직의 형성과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또한 양란 이후의 국가주도 재건책에 의해 향촌사회가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조선건국 초기의 향촌지배조직
전근대 사회의 국가 권력은 향촌지배체제 속에 직접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향촌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가는 대민, 대향적 직접지배체제의 수립이라는 문제가 국가 재정에 큰 영향을 주고 위와 같은 지배체제의 수립을 위해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확립해 나간다. 여기에 있어 조선왕조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후에 군현제적 질서 및 면리제의 시행을 통해 향촌을 장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
15세기 조선왕조는 거리의 원근이나 사무상의 편리를 감안하여 군현구획을 개편, 병합하고 월경지(越境地) 소속읍과 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군현(郡縣)의 특수구역.
,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두입지(斗入地)라고도 한다. 군현의 경계가 개의 이빨이 서로 물려 있듯이 들고 난 모양을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군현의 경계를 정할 때 자연적인 지세를 따라 결정한 데서 나타난 현상이다.
등의 정리를 포함하는 군현제의 정비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군현제의 정비와 더불어 그 하부조직으로서 면리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조직의 최말단이며 민과 접촉하는 부분인 면리제의 운영 직임에는 재지세력인 품관의 임명을 원칙으로 하여 향촌지배의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정부는 촌락민에 대한 재지 토호세력의 사적 지배와 수탈을 배제시키고 통치 질서를 확립하여 조세 및 국역 부담계층을 확보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촌락 지배를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노력은 어려움이 뒤따르게 되었다. 먼저 당시의 촌락발달정도가 면리제 시행에 맞춰 제대로 정비 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정책의 운영에 있어 향촌사정에 정통한 유향품관층(留鄕品官層)을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향품관층들의 참여 거부로 인해 재지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면리제 운영 과정에 있어서 국가의 외형적 질서가 자생적 질서와 맞지 않게 되었고 민과의 결합도도 취약성을 드러내 점차 경직되어 가고, 15세기 이후 향촌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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