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징비록, 난중일기, 임진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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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이순신 장군의 생애
2. 징비록
3. 난중일기
4. 임진록(壬辰錄)
5.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순신 장군의 생애>

《이순신 장군》

1. 32세에 무과에 급제하다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고려왕조에서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敦守)의 12대 손이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현재의 서울 인현동인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貞)과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4형제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점치는 사람이 이르기를 “나이 50이 되면 북방에서 대장이 되리라”하였으며, 이순신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 변씨의 꿈에 조부인 참판공(叅判公)이 나타나 “이 아이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舜臣)이라 하여라”하였으므로 이를 따라 ‘순신’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성격은 과묵한 편이었다. 그는 농담하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매사에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울러 그는 무인에게 걸맞은 자질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보통사람들보다 팔 힘이 세었으며 말 타기·활쏘기에도 능했다.
1576년 32세가 되던 병자년 봄의 과거에서 병과에 합격하여 처음으로 관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순신은 무과과거에 급제하던 해인 1576년(32세)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權官: 종9품)으로 부임하여 2년 조금 넘게 근무하다가 35세가 되던 1579년에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가 되었다. 이후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使] 군관이 되었다가 36세 되던 1580년 7월에 전라좌수영 예하의 발포만호(萬戶: 종4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발포만호로 근무하던 1582년 이순신은 군기(軍器)를 점고하러 온 경차관이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장계하여 파직된다. 발포만호에서 파직된 지 4개월 만인 1582년 5월에 다시 훈련원 봉사에 복직되었다. 다음해인 1583년 7월에는 함경남도절도사이용(李庸)의 군관으로 있다가 10월에 함경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종9품)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 오랑캐 두목 울지내를 잡아 죽인 공로로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승진하였다.
42세가 되던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종6품)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북쪽에서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조산보 병마만호[종4품]에 임명하였다. 다음해인 1587년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하게 되었는데, 이순신은 이 섬이 외롭고 내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위태로움을 직감하고 군사를 더 파견해 달라고 상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직속상관인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끝내 이 제의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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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석,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2005), 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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