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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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쌍계사의 창사

2. 쌍계사의 가람 배치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구층석탑

팔영루

진감선사 탑비

적묵당

설선당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청학루

팔상전

영모전

금당(육조정상탑전)

참고문헌
본문내용

구층석탑

구층석탑은 고산스님이 인도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 삼과(三顆)와 산내 암자인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이과(二顆)와 전단나무 부처님 일위(一位)를 모셨다. 때마침 발심서원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신불(神佛)이나 자기 마음속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움.
한 백창기 부부의 단독시주로 불기 2531년(1987년) 1월 3일 시공하여 불기 2534년(1990년) 3월 15일 완공하였다.

팔영루

팔영루는 우리나라 불교 음악의 창시자인 진감선사(774년-850년)가 중국에서 불교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민족에 맞는 불교음악(梵唄)을 만든 불교 음악의 발상지이며 훌륭한 범패 명인들을 배출한 교육장이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 부처가 지닌 여덟 가지 특색 있는 음성. 극호음, 유연음, 화적음, 존혜음, 불녀음, 불오음, 심원음, 불갈음을 이른다.
로써 어산(魚山)범패를 작곡했다고 해서 팔영루라고 한다. 신라 문성왕 2년(840년) 진감선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인조19년(1641년) 벽암 스님이 중수한 후 1978년 고산스님이 완전히 중수하였다.

진감선사 탑비

이 탑비의 주인인 신라 말의 명승 진감선사는 전주 익산 사람으로 속성이 최씨이다. 어머니 고씨가 “제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한 뒤 사라진 스님 꿈을 꾼 뒤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태어나면서 울지도 않았다는데 사람들은 ‘일찍부터 소리없고 말없는 짚은 도의 싹을 타고났다’고들 하였다. 20세에 이르기 까지 부모를 오랫동안 봉양할 뜻이 간절하였으나, 상을 당하자 “길러준 부모 은혜는 힘으로 갚았으나 오묘한 도리는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아니하랴. 박과 오이가 덩굴에 매인 것처럼 내 어찌 젊은 나이에 한구석에 박혀 있으리오.”하고는 애장왕 5년(804)에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의탁하여 당나라로 가 신감대사를 만나 계를 받았다.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지리산 화개에 이르러 dlfWLr이 삼법이 일구었던 옥천사를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문성왕 12년(850) 77세를 일기로 입적하기 까지 쌍계사에 머물렀다.

진감선사 탑비는 신라 정강왕이 신라 말기의 고승 진감선사 혜소(774년-850년)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흠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玉泉寺)를 쌍계사(雙磎寺)로 명명하고 건립한 것이다. 진감선사라는 시호는 신라 헌강왕이 시호한 것으로 진감선사비문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선사의 열반이 문성대왕 때였는데 왕의 심금이 측연하여 장차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 하다가 그 유계를 듣고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삼기(三紀)를 지난 뒤에 문인이 그 사적의 인멸을 우려하여 법을 흠모하던 제자들에게 길이 썩지 않을 방법을 의논하여 돌에 새기기를 주청하였다. 885년에 헌강왕이 진감선사라 시호하고 대공영이란 탑호를 주었으며 이내 전자의 새김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영구히 하라 하였다.

이렇게 885년 헌강왕에 의해서 선사의 시호가 내려지는 것과 동시에 하명된 비의 건립은 886년 8월 정강왕이 즉위하여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으며 이에 최치원이 글씨도 직접 써서 887년에 건립되었다. 비면에는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손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영조 때 만들어 놓은 목판에 ‘광무 3년 7월 일건’ 이라고 건립연대를 밝히고 있어 그 연대를 알 수가 있다.

비명은 최치원이 정강왕으로부터 비명을 지으라는 하명을 즉위 원년 말에 받아서 정강왕 2년에 완성하였으나 정강왕이 병들어 7월 5일에 돌아가자 진성여왕 원년에 건립한 것으로
참고문헌
조수현, 『한국 금석문 법서선집 - 쌍계사 진감선사비』, 이화문화, 1998
한국 문화유산 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지리산 자락』, 돌베게, 1996
쌍계사 홈페이지 (www.ssangyes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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