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사건 연대표.세자의 죽음과 폐서인 조선왕조실록 비교 사도세자의 병증 창경궁 경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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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중록閑中錄>
記四
연대표
사건 연대표.
세자의 죽음과 폐서인.
내용
P.296-316.
조선왕조실록 비교.
자료
사도세자의 병증.
임오화변에 대한 각 관점.
풍속, 인물 조사.
목차
왕조 년도
(서기)
혜경궁 홍씨의
나이
날짜
사건
영조 26년
(1750)
16세
8월 27일(정유)
첫 원손(의소)의 탄생.
영조 28년
(1752)
18세
3월 4일(을축)
의소의 죽음
9월 22일(기묘)
원손(훗날의 정조)의 탄생.
영조 38년
(1762)
28세
윤5월 13일
(을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힘.
윤5월 21일
(계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아사(餓死).
7월 23일(계미)
사도세자의 인산(因山)과
영조가 사도세자의 묘에 거둥함.
영조 40년
(1764)
30세
2월 20일(임인)
세손(훗날의 정조)가 효장세자의 후사를 잇게 됨.
7월 7일(정사)
사도세자 담사를 지냄.
7월 26일(병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선희궁)이
하세함.
사건 연대표
선희궁이 직접 영조를 찾아가 밀고(密告)함.
선희궁(宣禧宮) : 영조(英祖)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
자모지심(慈母之心) :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
자애(慈愛) :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도타운 사랑.
대조(大朝) : 왕세자가 섭정하고 있을 때의 ‘임금’을 일컫던 말, 여기서는 ‘영조’.
불능무감(不能無憾) : 유감이라 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종신지통(終身之痛) : 일평생의 고통.
이대도록 : ‘이다지(이러한 정도로)’의 잘못.
사심(私心) : 선희궁의 사도세자에 대한 사사로운 정.
유유지지(悠悠遲遲) : 계속 늦추고 늦추다.
선희궁께오서 병드신 아드님을 어찌 책망하여 믿을 것이 없으니, 자모지심(慈母之心)이 다른 아들 없이 이 아드님께만 몸을 의탁하여 계오시니 차마 어찌 이 일을 하고자 하시리오. 처음에 자애를 받잡지 못하와 이같이 되오신 것이, 대조(大朝)께서 불능무감(不能無憾)하시니 당신이 종신지통(終身之痛)이 되어 계시나 이미 병세가 이대도록 극진하고 부모를 알지 못할 지경이니, 사심으로 차마 못하여 유유지지(悠悠遲遲)하다가 행여 병증이 급하여 알아볼 것이 없이 차마 생각치못할 일을 저지르려 하오시면 사백년 종사를 어찌하리오.
영빈 이씨
연도
1764년 7월 26일에 경희궁(慶熙宮) 양덕당(養德堂)에서 생을 마감함.
가족관계
영조(英祖 : 1694년~1776년)의 후궁.
사도세자(思悼世子 : 1735년~1762년)의 어머니.
정조(正祖 : 1752년~1800년)의 할머니.
영조 6년
(1730)
어려서부터 궁녀 생활을 하다 귀인이 되었으며, 1730년 영빈으로 봉해졌다.
영조 38년
(1762)
임오화변의 밀고로 사도세자 사사의 명분을 제공했다.
영조 40년
(1764)
아들인 사도세자가 사망한 2년 뒤인 1764년 7월 26일에 경희궁(慶熙宮) 양덕당(養德堂)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영조가 매우 슬퍼하며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를 치루게 했다.
정조 12년
(1788)
‘선희궁(宣禧宮)’이 되었다.
묘지명 제목에 ‘御製暎嬪李氏墓誌’라 쓰여 있어 묘지문을 영조가 직접 지은 것을 알 수 있고, 글씨는 영조와 영빈 사이의 맏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혼인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 1725년~1790년)이 썼다. 묘지문에는 영빈이씨의 가계와 그가 영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6녀에 관한 내용, 성품, 영조가 애도의 마음을 표한 글 등이 적혀 있다.
선희궁이 직접 영조를 찾아가 밀고(密告)함.
성궁(聖躬) : 임금의 몸을 높여 이르는 말. 성체(聖體).
하릴없다 :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삼종혈맥(三宗血脈) : 효종, 현종, 숙종의 혈속.
십삼일 : 영조 38년(1762) 임오 윤 5월 13일.
작야(昨夜) : 어젯밤
빈궁(嬪宮): 왕세자의 아내. 작자인 혜경궁 홍씨 자신.
체읍(涕泣)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욺. 읍체(泣涕).
대변(大變) : 큰 변화. 큰 사변.
전좌(殿座) : 친정(親政)·조하(朝賀) 때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와 앉음. 또는 그 자리.
경현당(景賢堂) : 경희궁의 편전(便殿)
관광청(觀光廳) : 공연이나 행사를 즐겨볼 수 있도록 만든 집.
당신 도리가 성궁(聖躬)을 보호하옵는 대의가 옳고 이미 병이 하릴없으시니 차라리 몸이 없는 것이 옳고, 삼종혈맥(三宗血脈)이 세손께 있으니 천만번 사랑하여도 나라를 보전하기가 이밖에 없다 하오셔, 십삼일 내게 편지하오시되, “작야(昨夜) 소문이 더욱 무서우니 일이 이리된 후는 내가 죽어 모르거나, 살면 종사를 붙들어야 옳고 세손을 구하는 것이 옳으니 내 살아 빈궁(嬪宮)을 다시 볼 줄 모르노라.”만 하여 계시니 그 봉서(封書)를 붙들어 체읍하였으나 그 날 대변(大變)이 날 줄이야 어이 알았으리오. 그 날 아침에 대조께서 무슨 전좌(殿座)나오려 하시고 경현당(景賢堂) 관광청(觀光廳)에 계시니 선희궁이 가오셔 우시며 고하시되
선희궁이 직접 영조를 찾아가 밀고(密告)함.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아오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정리에 못 하올 일이오되,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평안히 하옵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오소서,”하시고, 또 하시되 “부자지정(父子之情)으로 차마 이리하시나 병이니, 병을 어찌 책망하오리이까. 처분은 하오시나 은혜는 끼치오셔 세손 모자를 평안케 하오소서.” 하시니, 내 차마 아내로 처하여 이를 옳이 하시다 못하나 일인즉 하릴없는 지경이니 내 따라 죽어 모르는 것이 옳되 차마 세손으로 결치 못하였으나 만난 바의 기궁흉독(奇窮凶毒)함을 서러워할 뿐이로다.
기궁흉독(奇窮凶毒) : 살기가 몹시 어렵고 흉악하고 독함.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사도세자.
할자인정(割慈忍情) : 자정(慈情)을 끊고 정리에 차마 못함.
퇴흉운절(堆胸殞絶) : 가슴을 치고 기절함.
양덕당(養德堂) : 경희궁 양덕당. 영빈 이씨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폐식잠와(廢食臥) : 음식을 먹지 않고 누워 있음.
선원전(璿源殿) : 태조 이하 역대 임금과 왕후의 영정을 봉안한 곳. 창덕궁 인정전 서편에 있는데 본시는 도총보(都摠府)로서 효종 때 경덕궁 경화당을 헐어 이리 이건하고 춘운(春)이라 하였다가 숙종 때 선원(璿源)으로 개명하고 어진(御眞)을 봉안함.
수구(水口) : 물이 흘러 들어오거나 흘러 나가는 곳.
몸을 빠치오시고 : 몸에 상처가 많이 나시고
대조께서 듣자오시고, 조금도 지체하오시며 자처하시지 아니 하오시고 창덕궁 거동령을 급히 내려오신지라. 선희궁께오서 할자인정(割慈忍情)하여 대의로 말씀을 아뢰시고 인하여 퇴흉운절(堆胸殞絶)하오셔, 당신 계시던 양덕당(養德堂)에 오셔 폐식잠와(廢食臥)하시니 만고에 이런 정리 어디 있으리오. 전부터 선원전(璿源殿) 거동하오시는 길이 두 길이니 만안문(萬安門)으로 드오시는 거동은 탈이 없고 경화문(景華門) 거동이신즉 탈이 나는 지라. 거동령이 경화문으로 나오시니, 그날 소조(小朝)께서 십일일 야(夜)는 수구(水口)로 다녀오셔 몸을 빠치오시고
역대 임금과 왕후의
영정이 봉안된 곳
선원전(璿源殿).
1실
2실
3실
4실
5실
7실
8실
9실
10실
11실
태고조황제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정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사도세자.
통명전(通明殿) : 창경궁의 내전.
엄지(嚴旨) : 임금의 엄중한 명령.
동교(東郊) : 서울 동대문 밖 교외
달작시나 : 달포 가까이,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조재호(趙載浩) : 조선 영조 때의 문신(1702~1762). 효순왕후의 오빠. 1762년 임오 화변시 세자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사사(賜死) 당함.
원임대신(原任大臣) : 전에 의정(議政)의 벼슬에 있었던 벼슬아치.
계방(桂坊) :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별칭.
조유진(趙維進) : 조재호(趙載浩)의 종질(從姪). 임오화변 당시 세마 조재호에게 갔다 온 죄로 혹심한 형벌을 받다가 죽음.
십이일은 통명전(通明殿) 계신데 그날 들보에서 부러지는 듯이 장히 소리가 나니, 들으시고 탄식하시되 “내 죽으려나 보다. 그 어인 일인고.” 하시고, 그때 선친이 재상으로서 첫 오월에 엄지(嚴旨)를 만나셔 파직하시고 동교(東郊)에 달작시나 나가 계시니 소조께서 당신이 스스로 위태하셨던지, 조재호가 원임대신(原任大臣)으로 춘천 있으니, 계방(桂坊) 조유진으로 하여금 말을 통하여 올라오라 하신다 하니, 이런 일을 보면 병환 계신 이 같지 아니하니 이상한 하늘이로다.
창경궁 통명전 [ 昌慶宮 通明殿 ]
창경궁 내전이며 왕실의 대비(大妃)들이 거주했던 공간이다. 내전을 이루는 전각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며 규모가 크다. 1484년(성종 15년)에 지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광해군 때인 1616년에 중건하였다가 이괄의 난으로 다시 전소되었으며 1633년(인조 11년)에 재차 복구되었다. 하지만 1790년(정조 14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3년(순조 33년) 중건하였다.
조재호[趙載浩]
{21E4AEA4-8DFA-4A89-87EB-49C32662AFE0}연도
1702(숙종 28)∼1762(영조 38).
이칭별칭
본관 - 풍양(豊壤).
자 - 경대(景大).
호 - 손재(損齋).
가족관계
아버지 - 좌의정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문명(文命)
어머니 -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교관 창업(昌業)의 딸
영의정 현명(顯命)의 조카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오빠
1739년(영조 15)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천거로 세자시강원에 등용.
1752년 우의정이 되어 『천의소감(闡義昭鑑)』의 편찬을 주장(主掌).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계비(繼妃)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 은거.
1762년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 사사되었다가 1775년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저서로 『손재집』 15권이 있다.
영조의 거동령에 혜경궁 부르는 사도세자
공구(恐懼) : 몹시 두려움.
기계(器械) : 병기.
경춘전(景春殿) : 창경궁 안 내전.
가마두에 : 가마뚜껑.
사면장(四面帳) : 천을 여러 폭으로 이어서 사면에 둘러치는 휘장(揮帳)
학질 (疾) : 몸을 벌벌 떨며, 주기적으로 열이 나는 병이다.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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