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답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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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저는 창경궁에 대해서 답사보고서
▶창경궁
창경궁은 본시 수강궁으로 태조 4년에 낙성한 후로 자주 사용하지 않아 황폐화되어 있다가, 성종이 재위 14년(1483)에 왕의 조모인 정희왕후, 모후인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위하여 수리하고 확장함으로써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창덕궁에 있던 왕이 왕후 등을 자주 찾아뵙기도 하고 조신들을 면회하기도 하던 궁궐이었던 만큼 창덕궁광의 사이에 담장이 있긴 있었으나 그 경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그 후 큰 변화없이 유지해오다가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던 궁은 광해군 8년(1616)에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복구되어 왕이 머물게 되었으므로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조선 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또한 창경궁에는 역사적인 여러사건이 벌어졌었다. 숙종 때 계비 민씨와 장희빈의 갈등으로 빚어진 신사년의 변고가 일어났는가 하면 영조때 왕이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궁내 선인문 안뜰에 8일간 두어 죽게 한 신임년(辛壬年)사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후 창경궁 경내에 동물원, 식물원을 설치하였는데, 그것은 창덕궁에 우울하게 기거하는 순종황제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다. 이 와중에 창경궁은 크게 손상을 입는다. 명정전 남북 행각 이외의 경내에 있던 모든 행각과 궁문궁장이 훼철되고, 심지어는 궁전의 초석까지도 파내어 홍화문 안 어구의 제방으로 사용하는 등 세인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또 선인문 안쪽 보루각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동물원이, 춘당대 일부에는 식물원이 배치되어 시민의 관람 장소로 바뀌었다. 한편 이러한 창경궁의 동물원, 식물원, 박물원 등의 삼원을 합한 명칭을 그 소재지가 비원 동쪽에 있는 어원이라는 의미에서 동원(東苑)이라 하였다가, 다시 창경궁 소재를 의미하는 창경원으로 고쳐 일반에 공개하였다. 이로써 창경궁은 조선 왕조 궁궐로서의 권위를 잃고 한낱 서울 시민의 유흥장으로 변모해버렸다. 정부 당국은 해방 후에도 수십 년 간 무심하게 놀이터로 이용해 오다가 1984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궁의 복원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창경원이라는 명칭을 본래대로 창경궁으로 고치고, 궁내의 동물사를 모두 서울대공원으로 이주시키는 한면, 일본인들이 고의적으로 심어 놓은 벚나무를 제거하였다. 1986년엔 일부 전각을 복원하였는데, 편전인 문정전과 법전인 명정전과 정문 사이의 좌우 행각을 복원하였으며, 최근에는 통명전 뒤쪽 언덕에 있던 장서각(옛 박물관) 건물을 허물어 버렸다. 그 결과 창경궁은 어느 정도 제 모습을 찾았으나 아직도 그 많던 전각과 누정(樓亭)들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1.단아한 자태의 법전-명정전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서 명정전으로 가려면 옥천교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의 양쪽 끝 기둥머리 위에는 석수가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다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주시하면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법전을 지키고 있는 이 문지기를 사랑스럽다고 하면 결례가 되겠지만 이 놈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머리를 한 번 슬쩍 쓰다듬고 다리를 건너면 명정문이 앞에 나서고, 저만치 명정전의 아담한 자태가 보인다. 명정전은 15세기 광해군 때 지어진 건물이다. 명정전은 고졸함을 머금고 있어 여성적인 단아함을 느끼게 한다. 이는 창경궁이 당초 왕이 정치를 행하는 곳으로 건립된 곳이 아니라 왕대비가 거주할 별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명정전 안을 들여다볼라치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쓴 금지 팻말이다. 그런데 영어로 번역해 놓은 ‘KEEP OUT’ 이란 말은 같은 값이면 ‘밖에서 구경하세요’라고 했으면 더 부드러울 걸 그랬다. 과거에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을 적대시하면서 모든 것을 무조건 강요하고 위협했다. ‘안내’, 또는 ‘알림’이 아니라 무조건 ‘경고’가 아니면 ‘금지’ 였다. 그 잔재를 일재의 상처가 깊은 창경궁의 법전에서 보니 마음이 씁쓸하다. 문전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어좌가 놓여 있고, 그 뒤에 오봉산일월도가 펼쳐져 있다. 어좌 위 천장에는 나무로 조각된 봉황 한 쌍이 구름 사이를 날고 있다. 다시 처마 밑을 보니 편액이 매우 가깝게 보인다. ‘明政殿(명정전)’이라고 굵게 쓰인 글씨를 애워싸고 있는 틀에 붉고 푸른 색깔의 작은 문양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편액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2. 건물의 얼굴-편액
이름 없는 사람이 없듯이 도성(都城)이나 구중궁궐의 전각과 문마다 그 이름을 알려 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건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편액에서 우리는 선인들의 사고 방식과 길상 의식의 한 단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흥미 있는 편액 몇을 골라 그 담긴 뜻을 살펴보기로 하자. 남대문, 즉 ‘숭례문’의 글자 가운데 ‘예(禮)’자를 오행에 배치하면 불(火)이 되고, 오방에 배치하면 남쪽이 된다. 다른 성문의 편액이 가로로 TM여 있는 데 반하여 숭례문의 편액만을 세로로 쓴 데는 숭례(崇禮)‘의 두 글자를 위로 타오르는 형상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로써 경복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화산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듯이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궁궐 내의 전각이나 문 이름에는 음양 오행의원리를 적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오행에서 봄은 동쪽, 가을은 서쪽에 해당되므로 경복궁의 동쪽 문은 건춘문, 서쪽 문은 영추문이라 했고, 사정전 좌우에 있는 전각을 만춘전, 천추전이라 한 것이다. 여기에 예로 든 것뿐만 아니라 궁궐의 모든 문이나 전각의 이름도 대부분 이런 원리가 적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편액은 건물의 얼굴이니만큼 그 의미를 깊게 함과 아울러 장식도 아름답게 하였다. 장식 문양은 길상의 의미를 지닌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문양들은 동양 전통의 길상 장식 문양으로 상서로운 물건이나 동식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교에는 팔보라는 것이 있는데 의식에서 사용되는 여덟가지를 모아 만든 일종의 길상 도안이다. 불교의 팔보는 도교의 팔보처럼 궁궐 편약 문양으로는 자주 활용되지는 않지만 약간의 변형을 가해 나타나기도 한다.
3.사도세자의 비극-통명전 앞뜰
명정전 뒤쪽으로 나오면 경춘전과 환경전이 나타나고 그 뒤로 높은 화계를 배경으로 통명전이 멀리 보인다. 통명전에는 용마루가 없어, 왕비의 침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지금은 우리가 무심히 거닐고 있지만 옛날 이 주변에서 사도세자의 비극과 인현왕후의 참극이 벌어졌다. 영조 38년(1762)5월 어느 날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의 엄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뒤주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세자는 그 지옥 같은 뒤주 속에서 8일간의 고통을 겪은 끝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운명이라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외아들 세자를 강박증으로 몰아넣었을 만큼 미워하고 호령했던 종잡을 수 없는 영조의 편벽성 때문에 세자는 욕구 불만에 차 광기를 부렸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비명에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자리가 바로 통명전 앞뜰이다. 그런가 하면 이 곳은 숙종 때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암투를 벌인 현장이기도 하다. 세자가 거닐었을 통명전 옆 지당(池塘)에는 아직도 물이 맑고 빈궁이 길어다 먹었을 통명전 뒤뜰의 열천(列泉)은 아직도 찬데, 그들이 거처했던 전각들은 지금 구들장 없는 강당처럼 변하여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실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전각들이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1911년 11월 부터다.
박물관이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 등이 훼손되었다. 많은 유물들을 새로 건립한 박물관에 모두 진열할 수 없게 되자 일제는 내전 건물을 진열실로 사용하기 위해 구조를 마구 변조하여 사용한 것이다. 해방 이후 몇 차례의 문화재 보수 작업이 있었으나 외관을 보수하는 차원에 머물렀을 뿐 내부는 손질하지 않고 그냥 둔채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4.통명전의 연당
통명전, 경춘전 일대에 있는 화계는 다른 곳에 비해서 매우 높고 가파르다. 그만큼 이들 전각들이 있는 지대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얘기가 된다. 통명전과 양화당 앞뜰에 우물이 많이 보인다.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뒷산 밑에서도 작은 연못을 하나 만들어 놓았다. 통명전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연당이 바로 그것이다. 연당은 화강석을 다듬어 사방에 쌓았고, 감싸고 도는 돌난간 기둥 머리마다 금방 피어날 듯한 꽃봉오리와 연잎이 새겨져 있다. 거기다 못 가운데 섬을 만들 듯이 석분에 괴석을 심어 배치하였으니 경복궁 향원지처럼 연당의 모양을 다 갖춘 셈이다. 이 연당에 돌다리 하나가 놓여 있다. 향원정 연지처럼 규모가 크다면 몰라도 아담한 이 곳에 굳이 돌다리를 만든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아마 향원지처럼 일반적인 연못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다. 통명전의 여인들은 이 작은 연당 곁에서 긴 치맛자락을 끌면서 연꽃 가득한 선계의 연지를 그려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5.창경궁의 시련과 보수 그후
창경궁 안에 동물원 등 관람 시설을 세운 것은 일제가 마지막 황제 순종 임금으로 하여금 신기한 물건에 정신이 팔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생각을 잊게 만들고, 저들에 대한 한국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책략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한마디로 당시의 우리 순진한 국민들은 일제의 잔꾀에 농락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백 년 조선 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의 상징인 궁궐을 놀이장으로 만들어 그 권위를 실추시키고, 역사를 단절시키려 했던 일제의간계에 속아 놀아났으니 말이다. 조선시대 표준 시계를 설치했던 보루각 터에 동물원을 설치하여 놀다니 일제는 그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수난과 혼란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창경원은 조용해졌다. 1984년에 있었던 보수정화 사업으로 그 어지럽던 벚꽃이 죄다 뽑혀 나간 자리에는 소나무가 심어지고, 창경궁의 본래 이름도 되찾았다. 고궁의 편안한 적막은 되찾았으나 한번 사라져 간 그 많던 전각누각들은 지금도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지금 저 넓은 잔디밭은 봉분만 없을 뿐 창경궁의 슬픈 역사의 무덤이다.
창경궁에 대해 조사하면서 일제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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