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로부터 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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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Third Period : From Tang to present
1.중국의 역사
(1)당나라의 건국과 멸망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장안을 수도로 삼고 건국하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고창국과 비단길일대를 장악하고 돌궐을 정복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도 정비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당나라 시대의 율령 체제가 완성되었다. 태종의 이러한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貞觀-治)라고 부른다. 당나라는 이후 잠시 쇠퇴 하였다가 현종이 즉위하자 당나라는 다시 전성기를 누리는 데 이를 개원의 치(開元-治)라고 한다. 이 시기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경교)가 불교와 더불어 꽃을 피울 정도로 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현종은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또한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토번, 거란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토번, 돌궐 등의 이민족의 침략 등으로 국력이 약화된 당나라는 현종 재위 말기부터 귀족들의 장원 토지가 증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755년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매우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이 되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꾸었다. 수 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2)송나라(북송) 건국과 멸망
1111년의 북송의 판도후주(後周)의 근위군 대장이었던 조광윤이 후주 최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중국의 분열상태 종식을 목표로 삼았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동생 조광의(태종 조광의)가 뒤를 이어 형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국의 통일을 이루고, 과거제도의 충실을 기도했다. 과거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시대에 완성되어졌다. 과거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제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동시에 과도한 문관우대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자 진종은 요나라에 대해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또한 요나라의 침공과 동시에 서쪽의 탕구트족은 서하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워 송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것도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그 결과 획득한 평화를 토대로 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국방비의 증가와 대상인, 대지주 증가로 일어난 세수(稅收) 감소 등에 대해 개혁이 촉구되어 6대 황제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은 왕안석의 신법이라 불리었고, 주로 영세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했으나,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쪽 출신인 관료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들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하게 증가하여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을 기울게 하였다. 이때쯤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함께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약속을 맺었다. 1121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들어나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1127년 카이펑이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 흠종(欽宗), 태상황 휘종(徽宗)을 북쪽으로 사로잡아 갔다(정강의 변).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는 남쪽으로 천도하여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여 고종으로 즉위하였다. 이 이후부터 송나라는 남송이라고 불리었다
(3)송나라(남송)의 건국과 멸망
1142년의 남송의 판도조구는 1127년 즉위하여 고종(高宗)이 되었고, 송나라를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등의 활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고, 악비는 살해되었다.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으나, 금나라의 황족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해릉왕는 죽고 완안옹은 금나라의 금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해 고종은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으나, 한탁주(韓)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하고 반대파의 대량탄압을 일으켰다(경원의 당금(慶元の禁). 이 시기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 한탁주는 금나라가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1207년 금나라의 요청으로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 후 송나라군은 북상하여 낙양과 카이펑을 회복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쿠빌라이가 양양을 함락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져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사실상 송나라는 멸망했다.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항전을 계속했던 일부 황족, 관료, 군인들도 1279년 광주만의 애산(厓山)에서 원나라군에게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4)명나라의 건국과 멸망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 왕조는 14세기에 들어와 제위상속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능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차례로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가 1351년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홍건군의 일부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출신 주원장(훗날 태조 홍무제)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여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조사 및 인구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배포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홍무제는 건국공신을 숙청하고, 재상이 있던 중서령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1398년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였던 손자 건문제와 숙부였던 홍무제의 아들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 북경을 중심으로 북방의 방비를 맡았던 홍무제의 4남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다(정난의 변). 1402년 주체는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였다. 영락제의 즉위로 인해 정치의 중심은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다.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여 홍무제의 신중책을 바꿔, 왕성하게 세력을 넓혔다. 북쪽으로 후퇴한 원나라의 잔당(북원, 명나라에서는 이것을 타타르라고 부른다)은 1388년 토곤 티무르의 왕통이 단절되었으나, 영락제는 원정을 감행해 이들을 제압했다. 만주에는 여진족을 복속시켜 위소제에 조직해 넣는데 성공했다. 남쪽은 베트남을 진조의 내란을 틈타 정복하였다. 거기에 해외의 동남아시아, 인도양까지 위신을 넓히기 위해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를 파견하여 일부는 메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한 대원정의 결과, 다수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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