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통일의 내부적 기원에 관한 연구 베트남과 한국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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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분단과 통일의 내부적 기원에 관한 연구
- 베트남과 한국을 중심으로 -
Ⅰ. 서 론
1945년 8월, 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그동안 식민지배의 현실에서 고통 받고 있던 한국과 베트남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한국과 베트남에서는 해방 후 자주적인 민족국가의 건설이 이들의 최우선적 목표가 되었으며, 식민지 지배체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민족적, 사회적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렇게 한국과 베트남은 식민지 경험과 해방, 그리고 그 후 분단과 전쟁이라는 일련의 공통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전개에서, 냉전 체제로 인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요인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비슷한 경로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 베트남이 각각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는 시점, 즉 한국의 1953년과 베트남의 1975년에서는 전쟁 이전 동일한 역사적 지향과는 상이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좌우 이념의 대립이 더욱 뚜렷해지는 가운데, 결국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착적 분단’(frozen division)이라는 결과가 나타났으며, 베트남의 경우에는 1945년 순수해방공간에서 베트남인들이 추구하였던 식민잔재청산의 반제국주의혁명,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꾀한 민족해방혁명, 사회주의 수립을 추구한 사회주의 혁명의 3대혁명을, 비록 지연된 혁명의 형태나마 실현시켜 ‘베트남사람에 의한 베트남의 건설’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반제국주의와 민족해방에 대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두 단일민족국가, 한국과 베트남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겪으면서 서로 다른 역사적 방향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글의 논의는 한국과 베트남의 해방 전후 역사적 상황을 비교해 보면서,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나게 된 차이점을 밝히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Ⅱ. 연구방법론 및 분석틀
1. 연구방법론
한국과 베트남전쟁과 해방 후 상황에 대한 비교를 수행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연구들을 살펴본 결과, 전쟁이나 해방 후 상황과 같은 역사적 사실의 비교는 세세한 부분까지 잘 설명되고 있으나, 각각의 연구들마다 어느 정도 한계가 드러나 있었다. 예를 들어 강정구교수의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의 비교연구」에서는, 한국 전쟁의 과정을 5단계로 분석한 후 베트남의 역시 5단계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전쟁 전후에 대한 상황적 맥락의 서술이 부족해서 자칫 너무 도식적인 설명에만 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윤충로 교수의 「탈 식민국의 식민잔재와 혁명 - 1945년 해방 후 한국과 베트남을 중심으로-」에서는 외세개입을 통한 한국과 베트남의 상황 차이를 설명하고 있지만, 너무 외적변수에만 치중한 나머지 한국과 베트남의 내부주체세력에 대한 논의를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물론 한국과 베트남의 해방 이후 사회변화를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적변수를 고려해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해방 이후 냉전이데올로기는 2차대전 이후 혁명적 상황으로 변혁의 진통을 겪고 있던 한국과 베트남을 비롯한, 세계 전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모두 미국의 개입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적 맥락이 한국과 베트남의 사회변화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변수임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를 모두 고려하는 것은 우선 시간과 지면상으로도 한계가 있으며 앞선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보는 본 글의 관심과는 맞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외적 변수에 치중하는 것은 그에 따른 순환론적인 역사인식에 함몰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요컨대 가시적으로 두드러지는 변수를 외부적 요인으로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 모든 분석 가능한 단위들이 연속성을 보여준다고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다보면 그 내부의 동학을 놓쳐버릴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오히려 연속적인 외부변수의 존재 속에서 각각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요인은 내적변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전쟁의 전략과 과정의 차이나, 외세의 개입에 따라 달라지는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를 보는 데에 치중하기 보다는 한국과 베트남 내부의 주체적 역량이라는 내적변수들이 어떻게, 얼마만큼 역사적 상황을 다르게 만들어 나가는지 알아보려 한다. 그리고 그 변수를 민족주의로 상정한 후에 그것이 냉전이데올로기라는 외적 변수와 어떤 긴장관계를 보이고 있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 민족주의는 외세의 개입이라는 요인과 내부의 역동성이라는 요인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즉, 이후 글의 방향은 식민지 상황에서 분단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해방 이후의 한국과 베트남의 내부에서 있었던 사회변화와, 분열양상에 따른 갈등과 상황전개에 따라 설명되는 내적변수를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 질 것이다. 단, 논의에서 필요한 외적변수들은 이러한 내재적 사회변화의 구조적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관계의 연관성 측면에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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