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과 연개소문을 통해 본 동북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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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동북공정의 정의
1) 동북공정의 개념 및 등장원인
2) 동북공정의 연구과제 및 추진배경
3) 중국이 생각하는 동북공정의 성공 요건
2. 연구의 필요성과 범위
1) 연구의 필요성
2) 연구의 범위
① 고구려사로 한정
② ‘역사의 소유권’이라는 것이 옳은 가에 대한 비판적 탐구
Ⅱ. 본론
1. 주몽과 연개소문, 그리고 고구려
1) 주몽과 연개소문이 지니는 고구려에 대한 대표성
2) 주몽과 연개소문, 즉 고구려인의 국가 정체성
2. 동북공정의 진행상황
1) 한국에서 이슈화되기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동북공정
2) 동북공정의 선행 작업 : 귀근원, 중화삼조당의 건립과 치우 끌어안기
3) 고구려사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논쟁
3. 중국의 입장
1) 중국의 주장 내용 및 그 의미
2) 중국의 의도와 목적
4. 한국의 입장
1) 만주 지역의 고대사를 바라보는 한국의 관점
2) 한국 정부의 소극적 대응
Ⅲ. 결론
1.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책
2. 근본적 해결책 : ‘역사의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

본문내용
1. 주몽과 연개소문, 그리고 고구려

1) 주몽과 연개소문이 지니는 고구려에 대한 대표성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이며, 동부여출신이다. 부여는 BC 1세기경부터 30년 동안 퉁구스계의 부여족이 세운 나라인데 토지가 광활하고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지금의 북만주 눙안 · 창춘 일대에 위치했다. 해부루왕 때 아란불의 권고로 가섭원으로 수도를 옮긴 후부터는 동부여라고 칭하였다. 이후에 이 동부여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통합되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대막리지로서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보장왕을 옹립하고 당나라의 다섯 차례 침입을 격퇴했다. 곧 주몽은 고구려의 시작이고,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끝을 장식한 이라 봐도 무방하며, 이는 이 논문의 제목의 의미를 나타낸다.
주몽은 만주지역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웠으며 그 곳에서 활동했다. 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은 졸본으로 남하,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칭하고, 성을 고(高)라 하였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또한 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더욱 남하하여 백제를 세웠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실로 다양하다. 『삼국사기』에도 백제의 건국설화는 비류건국신화와 온조건국신화 두 가지가 존재하고,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설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비류와 온조가 소서노와 전 남편의 아들이고 아버지는 주몽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몽이 남하하여 소서노와 만나 쉽게 결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족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소서노는 졸본 지역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족장의 딸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토착세력과 만나서 쉽게 융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우리가 설명하려는 주몽에 대한 것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가 직접적으로 같은 혈통이라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맞서 만주지역을 굳게 지킨 인물이다. 연개소문 당시 고구려의 왕은 영류왕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당은 태종 이세민이 집권하여 고구려의 동맹세력인 돌궐, 설연타, 유연, 고창, 거란 등을 제압하고, 내실을 다져 ‘정관지치’라 불리는 황금시대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영류왕은 이를 방치했고, 결국 이 때 통합된 고구려의 전 동맹세력이 고구려를 노리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이 영류왕을 폐위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643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의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오는 등 당의 긴장을 놓게 하는 정책을 쓰는 한편 요하전선의 방어거점인 백암성, 오골성, 부여성, 안시성, 비사성 등을 수리해 당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세민은 연개소문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되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안시성에서 패퇴했다. 이후로도 당은 고구려를 침략했고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계속 막아냈다. 660년 겨울, 백제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당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포위했다. 신라는 당의 군량미를 조달하고 있었고, 당에서는 방효태의 10만 별동대가 평양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때 병석에 누워있던 연개소문은 방효태의 10만 별동대를 전멸시키고 사수대첩.
, 당의 침략을 막아내었다. 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연개소문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연개소문의 사망연도에 관해서는 657년, 661년, 665년 설이 있다.


2) 주몽과 연개소문, 즉 고구려인의 국가 정체성
과연 이러했던 주몽과 연개소문이, 즉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이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지만 여러 정황 근거를 살펴보았을 때 확실한 것은 자신들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들은 중국과 맞서 싸운 사람들이다. 그에 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1차 사료를 꼽자면 삼국사기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만약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면 굳이 삼국사기가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했을까? 고구려의 역사를 남겼다는 것은 당시 우리민족은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라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비슷
고구려와 백제 또는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서로 통역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고구려 장수왕 때 백제 개로왕의 신하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 투항했다는 것과 도림이 쉽게 개로왕에 접근했다는 점, 신라 거칠부가 고구려를 염탐하러 갔을 때 아무 거리낌 없이 의사소통을 했다는 점에서 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비슷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우리나라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는 걸로 보아 삼국의 언어는 지금보다 복잡한 사투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주정된다.
『후한서 권 85 고구려』
"동이족들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삼국지 권30 고구려』
"동이의 옛 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같다"
『후한서 권85 동옥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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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관. 〈여야 “中 역사왜곡 초당적 대처”〉. 《한국일보》. 2006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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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大正(마다정). 《동북공정 고구려사》. 서길수. (사계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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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 <동북공정의 배경과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의 구축>. (단군학회, 단군학 연구 제10호, 2004).
윤휘탁. <현대 중국의 변강․민족의식과 동북공정>.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겨울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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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식 외.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 월간중앙 역사탐험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2004).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서울 : 교육인적자원부, 2005).
“고구려사랑,” http://kogurea.org.
“우리역사바로알기 시민연대,” http://historyworl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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