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화약과 화포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9.02.03 / 2019.12.24
  • 9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2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목차
Ⅰ. 서론
Ⅱ. 화약과 화포의 발전 시기
1. 최무선
1) 초석의 원재료를 구하는 과정(취토와 취회)
2) 초석을 추출해내는 과정(사수→예초→자초/재련)
3) 정련한 초석, 유황, 목탄을 섞는 과정(도침)

2. 세종
1) 화약무기 발달의 원인이 된 여진족과 왜구
2) 화기류의 통합본, 총통등록

3. 임진왜란
1) 행주대첩
2) 명랑대첩
3. 경주대첩

4. 흥선대원군
1) 수뢰포
2) ‘대․중․소포’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우리나라의 화약과 화포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발전은 어떠하였을까? 우리나라의 화약과 화포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세조실록』에서 화포는 신라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정비되고 조선에 와서 완성된 훌륭한 무기라고 한 기록이 있다. 그 외에도 『고려사』등의 기록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화약과 화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약과 화포를 사용하게 된 시기는 상당히 빨랐고 고려시대에는 적들의 침략에 대응하는 전쟁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사무기가 널리 이용되었지만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화약의 제조법이 극비리에 붙여져 있었기 때문에 늘 화약무기를 중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최무선 시기부터 화약과 화포를 스스로 개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화약 무기의 기술이 발달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화약무기 기술이 꾸준히 발전한 것은 아니며 최무선을 시작으로 세종, 임진왜란, 대원군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무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자체개발하는데 성공한 사람으로 우리는 이 시기부터를 우리나라의 화약과 화포의 발전이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최무선은 중국의 염초 제조 기술자들을 수소문한 끝에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이라는 자가 개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통해 비법을 전수받았다. (최무선이 직접 원나라에 건너가 제조법을 배워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최무선의 업적은 고려 정부에서도 높이 평가하였고 최무선은 화약 무기의 개발을 적극 건의하여 1377년 ‘화통도감’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게 되었다. 화통도감에서는 화약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포들과 불화살, 포탄들을 만들었다. 1380년에는 진포해전에서 세계 최초로 화포를 이용한 해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고려 때의 화약 무기 기술을 계승하고 정비하였다. 세종에 이르러 화기의 대대적인 개량이 이루어졌으며, 화약무기가 대량 생산되어 전국에 널리 보급됨에 따라 같은 종류의 무기들의 치수의 규격이 서로 달라 어려움을 겪던 것을 보완하기 위해 화포를 표준화, 규격화하는 『총통등록』 편찬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지난 시기 같은 종류의 무기들의 치수와 규격이 달라 화살이 멀리 가지 못하던 것 등을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화약무기의 발전이 뜸했던 조선은 임진왜란 시기에 이르러서야 많은 화약무기가 개발되고 사용되었다. 그 중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시한폭탄은 임진왜란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외에도 승자총통(勝字銃筒)과 화승총, 쌍혈총통(雙穴銃筒) 등 많은 화포가 사용되었고 화차 역시 계속 발전하여 임진왜란시기 행주산성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나라의 방위력은 비할 바 없이 약화되어 열강의 침투가 시작되자 대원군 시기에 이르러서 화약무기의 발전은 다시금 이루어진다. 이때에 ‘수뢰포’라는 일종의 시한폭탄이 개발되었고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 외에 ‘대․중․소포’라는 화포 역시 개발 되었는데, 이는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화포라 볼 수 있다.
이처럼 특정시기에만 화약무기의 발전이 두드러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앞서 말한 네 시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그 당시 화약무기가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배경과 당시 개발되고 활용되었던 화약 무기들을 통해 화약무기의 발전이 특정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이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화약과 화포의 발전시기

1. 최무선

고려시대부터 화약무기들이 사용되었지만, 그 무기들을 발사하기 위한 화약은 중국에서 수입해야했다. 1370년경만 해도 세계에서 화약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화약 제조법을 국가 기밀로 철저히 감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스스로 화약을 개발하게 되는데, 그 장본인은 바로 최무선이다. 최무선이 20년이 넘도록 집요하게 화약 개발에 매달린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이는 아버지가 광흥창사로 일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통해서 조운선의 동향이라든가 왜구에 의한 피해상을 몸소 느꼈다. 화약을 개발해 왜구를 물리치겠다고 생각한 최무선은 자신의 노복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 1373년 마침내 화약 개발에 성공한다. KBS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효형출판사, 2003. pp.178~179.


참고문헌
김근배 외. 『한국 과학기술 인물 12인』해나무. 2005
두산. 『두산 세계 대 백과사전』. 두산. 2000.
문화체육부. 『한국인의 재발견』. 대한교과서. 1996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박성래. 『다시보는 민족과학 이야기』. 두산동아. 2002.
박성래.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교보문고. 1998.
박환수. “세종의 국방 및 군사분야의 업적에 관한 연구”. 대전대 경영행정사회복지대학원. 2004
안경전. 『개벽 실제상황』. 대원출판사. 2006.
이종호. 『천재를 이긴 천재들』. 글항아리. 2007.
한국과학사 편찬의원회編. 『한국과학사』. 여강출판사. 2001
http://www.krpia.co.kr/pcontent/?svcid=KR&proid=38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청년사. 1996
KBS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효형출판사. 2003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한국과학사] 행주대첩 승리로 이끈 조선의 첨단무기
  • 화약무기는 이름이 비슷하여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조선시대 각종 화약무기의 크기나 구경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의 각종 대형 화약무기는 세종시대의 화약무기와는 규격이 전혀 다르다.연대?~14451446~??~1555 또는15951596~16691670~근거자료조선왕조실록국조오례서례(1474)실물유물신기비결(1603),화기도감의궤(1615),화포식언해(1635)융원필비(1813),훈국신조구기도설(1867)주요대형총통

  • [한국과학사] 군사무기 발달로 본 한국 과학기술의 발달
  • 화약이 개발되기 전에는 원거리 공격 수단은 활을 제외하 고는 없었다. 하지만 전투선끼리의 싸움에서는 활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아 배끼리 맞닿 은 다음 백병전을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전투는 쌍방의 피해가 크고 또 그다 지 효과적이지 못하였다.하지만 전투선에 화포를 장착한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고려 말 시기의 군선에 장 비한 화기는 아직 그 성능이 유치한 단계이기는 하였으나 적어도 200보 내외의 거리를 두고 왜선을 공

  • [과학사개론] 과학과 전쟁
  • 과학사상과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 오랫동안 사용된 기술 장비의 적절한 조합-이것이 마침내 육상전을 크게 변화시키고, 교착상태를 종결시킨 무기이다-에 쉽게 의존하는 발명은 개념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신무기가 출현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사용될 수 있기 전에 그러한 무관심과 상상력의 부족을 극복해야만 했던 사실은 제 1차 세계대전을 특징짓는 것으로 보이는 무가치와 무

  • 청주대 사이버강의 한국사 기말
  • 과학사2) 문학과 예술활동1910년대계몽주의 문화 전개계몽적 근대 문학 선구자●최남선: 신체시(해에게서 소년에게)로 근대시 발전에 공헌●잡지 소년: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잡지로 신문화 운동의 선구●이광수: 한국 최초 근대적 장편소설 무정 발표1920년대 초반동인지 중심으로 예술성만을 추구하고 현실 문제에 소극적, 도피적인 경향 나타남동인지의 간행●김동인의 창조: 1919년 창간, 최초 동인지●염상섭의 폐허: 퇴폐주의적 성향●이

  • 한국의 농업발달과 유교문화, 과학기술사
  • 과학사학회지』14권 박성래, 1998,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교보문고 전상운, 2000.『한국과학사』, 사이언스북스 박성래, 2002, 「수용과완성: 중국 원형의 한국적 변형」『한국과학사학회지』24권 2호 이호철, 2003, 「조선전기 농경기술의 전개」,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국학자료원 구만옥, 2004, 「조선왕조의 집권체제와 과학기술정책: 조선전기 천문역산학의 정비 과정을 중심으로」, 『동방학지』124 전용훈, 2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