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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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 누구?
미켈란젤로의 풀네임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이고
1475.3.6부터 1564.2.18까지 살아 약 90년을 살았으며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미술가인데, 르네상스는 저번에 소명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설명했듯이, 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문화운동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게다. 그는 이전의 그 어떤 예술가도 누리지 못한 명성을 누렸던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렌체의 존경받는 소규모 은행가 집안으로 태어난 대단한 귀족의 후손이다. 당시 관례에 따라 그는 태어난 직후 석공의 아내였던 유모에게 맡겨졌다. 두세 살쯤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집안은 조토의 그림으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 성당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명석하고 내성적인데다 예민한 아이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돌아가시고 미켈란젤로도 다른 귀족들의 후손들처럼 고전문법학교에 다녔지만 라틴어보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해 아버지에게 매질까지 당했다. 그러나 고집이 센 그는 열세 살 때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갔다. 기를란다요에게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3년이었지만 겨우 1년쯤 지나서부터 미켈란젤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영감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그라나치를 통해 연로한 조각가 베르톨도를 알게 되었다. 베르톨도는 피렌체 출신의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의 제자였다. 베르톨도는 1491년에 사망했으나 젊은 제자 미켈란젤로의 재능이 워낙 탁월하여 로렌초 데 메디치는 자신의 궁에 방을 마련해 주고 후한 보수를 지급했다. 그러나 1년도 못 가서 로렌초가 죽고 그로부터 2년 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2) 조각상
혼란의 시기가 지나고 1496년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다. 미켈란젤로는 고대 조각에 대해 이미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2세기 로마의 <잠자는 큐피드>를 모사한 적이 있었는데, 진품과 너무나 흡사하여 미술거래상이 이 작품을 고대 진품이라 속이고 팔아먹은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속임수임이 드러났을 때 미켈란젤로는 오히려 뛰어난 재능에 대해 찬사를 받았다.
< 바쿠스상 >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첫 번째 의뢰인이 되어준 사람은 바로 그 모사품을 구입한 리아리오 추기경이었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1496년 바쿠스상을 의뢰했다. <바쿠스>는 술의 신 바쿠스와 사티로스가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모습이다.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바쿠스는 고전미술의 핵심인 균형과 안정감을 표현하기보다 자세가 불안정하고 거의 비틀거리는 모습이다. 배는 튀어나왔고, 가슴과 어깨는 약간 구부정하며, 시선은 오른손에 움켜쥔 포도주 잔을 숭배하듯 응시하고 있다. 술의 신을 표현한 로마 조각에서 풍기는 우아함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작품이 지니는 대단히 독창적인 면모는 다양한 위치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지만 리아리오 추기경은 결국 파격적인 인체 묘사를 시도한 이 작품을 거부했다.
<피에타>
리아리오 추기경이 미켈란젤로의 바쿠스 상을 거부하자 갈리가 이 작품을 사들였고, 조각품을 주문하는 계약에서 중개인이자 재정 보증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은 드라그롤라 추기경이 주문한 <피에타>였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 작업을 말한다.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은 겨우 24살 때의 일로 이 조각 자체도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듯하다. <피에타>의 성모님은 무릎에 쓰러진 죽은 아들 예수님보다 더 젊게 표현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순결한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훨씬 더 오래 간직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하물며 그 어떤 음란한 욕망에 단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던 성모님이 젊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반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나이가 든 것이다.” 이 조각상을 지배하는 것은 주변을 압도하는 고요함이다. 성모님은 다른 피에타 상에서 흔히 묘사된 것처럼 깊은 슬픔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대신 깊은 사색에 빠져 있고, 감상자도 함께 명상하기를 권하듯 왼손을 뻗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신의 섭리에 대한 복종을 다룬 심오한 작품임을 강조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품의 의도는 무거운 감상주의에 빠지는 대신 절제되고 아름다운 날카로움을 통해 구현되었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원작자를 표시한 것으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성모님의 어깨에서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 부분에는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제작’ 이라는 뜻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바사리는 단순하고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자신의 작품을 두고 밀라노 출신의 솔라리라는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방문객들의 얘기를 우연히 들은 미켈란젤로가 밤에 다시 돌아와 굵고 확실한 서체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론다니니 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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