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디스코음악과 패션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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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디스코음악과 패션
이번 발표에 1970년대 디스코에 대해서 조사를 하였는데, 1970년대 디스코음악이 패션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는 점에서 조사를 더 하게 되었다.
1970년대는 자유주의 저항과 엘리트 청년문화의 시대가 열렸다. 본격적인 미국풍의 컨텐포퍼리 팝음악 유입의 시기였으며, 60년대 말부터 형성된 청년 엘리트 문화의 본격적인 서구문화 수용의 시기였다.
1970년대 세계 경제는 찬란한 호황기를 누리며 외향적이고 소비적인 대중문화를 탄생시킨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은 감각적인 일탈을 낳으며 청년 문화로 발전했고, 1977년 <토요일 밤의 열기>가 세계적으로 히트하며 절정에 달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롭고 열정인 디스코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미국 비지스, 슈프림스 등의 디스코 음악 등이 한국에 상륙하면서 한국에서도 여자 pop 가수가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혜은이와 이은하가 있다.
디스코
- 레코드회사는 디스크자키가 사용하기 쉽게 30cm 싱글반(盤)을 만듦으로써, 리듬을 강조한 춤추기 쉬운 음악과 여기 알맞은 춤이 속속 출현하였다. 미국에서 흑인음악의 리듬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베트남전쟁과 석유파동 등으로 억눌린 젊은이들의 스트레스를 발산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1977년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가 세계적으로 히트하여 디스코 붐을 일으켰다. 디스코는 1970년대 말 한국에서도 젊은 층에 인기를 모아 이른바 디스코 풍조가 널리 퍼져 펑크 룩 ·디스코뮤직 ·디스크자키라는 풍속이 유행하였다.
1970년대 디스코하면 떠오르는 가수
1. 혜은이
혜은이는 원조 요정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1970년대 가요계에 한 획을 긋게 된다.
혜은이의 본명은 김승주이다. 1975년에 "당신은 모르실거야"로 데뷔했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으며, ‘제 3한강교’로 디스코 열풍을 일으켰다. 최초의 언니부대를 이끌고 다녔고, 패션, 헤어스타일등의 유행을 창조한 스타이기도 하다. 1978년 태평양가요제 입상 후 동남아 지역에 화제를 몰고 다녔던 원조한류스타 이다. 국제가요제 은상, MBC 10대가수 가수왕과 최고인가요상을 휩쓸고 다녔다. ‘제 3한강교’ 동영상을 보게 되면, 지금 현재 아이돌에 비해서 격한 춤은 아니지만 디스코의 핵심인 찌르기 춤이 숨어있었다.
2. 이은하
‘제2의 김춘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은하의 가창력은 대단하였다. 이은하는 어린나이에 데뷔를 하였으나 PD가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하나만으로 통편집을 당했다. 어린나이에 충격을 크게 받은 이은하는 얼굴 없는 곳에서 노래를 알리기 시작하였다. 1위를 계속 차지하자 결국 티에서도 얼굴을 비칠 수가 있었다. 디스코의 대표적인 곡으로는 ‘밤차’ 와 ‘아리송해’ 가 있다. 10대음악상을 휩쓸 정도로 인기도 대단하였다. 동영상을 보게 되면 이은하의 무대는 혜은이의 무대에 비해서 정말 사람이 흥이 절로 나게 만들었다. 지금 들어도 너무나 좋은 노래였다. 무대 위의 카리스마도 대단하였으며, 가창력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이 파워풀하였다.
이 두가수의 에피소드도 얽혀있었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혜은이를 보면 밥좀 먹고 다니라고 이야기를 하였으며, 그에 반대로 이은하는 하루에 빵 한입 먹었는데도 사람들은 굶고 다니라고 말할 정도로 그때 당시에도 외모지상주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0년대 패션
1970년대를 조사 하면서 문득 1970년대 패션이 궁금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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