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 양명학 - 하곡 정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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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양명학 - 하곡 정제두
양명학의 사상적 구조
토지 겸병의 심화로 인한 농민 봉기, 환관에 의한 전제 정치, 황실과 번왕(藩王) 간의 충돌 등 명대(明代) 중기의 제반 사회적 위기들은 당시 관학(官學)인 정주학(程朱學)이 이미 그 규제력을 잃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정주학이 당시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무력함을 예민하게 느꼈던 사상가가 바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다. 주희(朱熹, 1130~1200)와 동시대를 살았던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은 이미 주자학의 문제점에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주희가 세계를 물리(物理)와 오심(吾心)으로 이원화함으로써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내 마음이 곧 이(心卽理)’라고 선언하고 간이직절(簡易直截)한 공부를 제창하였다. 그는 “절대 사(事)를 논하거나 말단적인 것을 논하지 말고 오로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본래의 마음(本心)을 인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의미뿐 아니라, 내 마음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 근거하여 육구연은 육경(六經)이 모두 나의 해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주자학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노력 하였으나, 자신 또한 다른 극단으로 기울고 말았다.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아카데미, 한국철학사연구회 p.256~257
왕수인은 젊은 시절 주자학을 연구하였으나,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점점 주자학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그가 무엇보다도 불만스럽게 여겼던 것은 주자학이 “심(心)과 이(理)를 둘로 나누어 ‘지리(支離)’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선천적인 양지(良志)에 돌아갈 것인지를 연구하면서, 정 · 주(程朱)의 번쇄한 방법으로는 ‘자아의 뜻을 성실하게’ 할 수 없다고 여겼다.주자학의 특징은 궁리(窮理)를 지(知)에 가두고 이것을 행(行)과 분리시킨 것인데, 이 점 때문에 지리한 폐단을 낳았다는 것이다. 왕수인은 주희와 육구연의 문제점을 지양하는 가운데 그의 사상체계를 형성 하였다. 양명학의 골자는 심즉리설(心卽理說), 치양지설(致良知說),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다.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아카데미, 한국철학사연구회 p.257
그가 말하는 ‘심즉리’는 심이 이(理)와 합일되는 것이 아니고 심이 이인 것이며, ‘심리위일(心理爲一)’은 심과 이가 합일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하나라는 것이다. 주희는 격물의 격(格)을 지(至), 물(物)을 사물이라 하여, 격물치지를 사물에 지(至)하여 지(知)를 이룬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그는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그 이법을 궁구하면 하루 아침에 혈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왕수인은 격을 정(正), 물(物)은 조금이라도 뜻이 있는 심중(心中)의 물(物)이라고 보아, 격물을 심(心)의 부정(不正)을 바로잡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왕수인은 치지(致知)의 지(知)는 양지(良知)이며 치(致)는 완성이니, ‘치지’란 사람이 타고난 본연의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치지란 주희의 해석처럼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맹자가 말한 양지 · 양능(良能), 즉 배우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지(知)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왕수인의 이런 해석은 ‘심즉리’를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아카데미, 한국철학사연구회 p.258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명학의 골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왕수인은 당시의 학문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지금 사람들은 지(知)와 행(行)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반드시 먼저 한 뒤라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므로 마침내 죽을 때까지 행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이것은 결코 작은 병폐가 아니다.(『王陽明全集』 卷1, 「傳習錄」 上)
이것은 바로 지(知)에 치중하는 주자학의 학문 방법을 비난한 것이다. 양명학에서는 지와 행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함께 발전한다.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이다.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아카데미, 한국철학사연구회 p.258
2. 양명학의 수용과 배척
조선에서 양명학에 최초로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로는 남언경과 이요를 들 수 있다. 남언경과 이요는 양명학을 좋아하였고, 또 그들의 이런 사정이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을 최초의 양명학자로 취급하는 것은 『선조실록』에 의거한다. 거기에는 선조와 이요, 선조와 유성룡 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대화에서 보면 이요는 양명학의 장점을 고하였고, 선조는 양명학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유성룡은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또한 그 문집이 남아 있는 사람으로 장유와 최명길이 있다. 장유는 효종비 인선왕후의 아버지이며,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 학문풍토가 지닌 폐쇄성을 지적하여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학술은 다양하여 정학正學도 있고 선학禪學도 있고 단학丹學도 있으며,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왕陸王을 배우는 자도 있어서 문경이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유식 무식을 막론하고 산통을 끼고 독서하는 자는 모두 정주를 칭송하여 다른 학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우리 나라의 학문 풍토가 중국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중국에는 학자가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학자가 없다.” 그런 이유로 장유는 주희를 비판하고 오히려 양명학을 좋아하였다. 장유와 동시대인으로 최명길도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문헌에 자세한 것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우리는 그의 문집에서 그가 양명학을 독신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 당시 시대 상황으로 말미암아 그의 손자인 최석정은 그 조부가 양명학파가 아님을 역변하였고, 그의 가학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는 사람으로서 양명 좌파의 사상을 수용한 사람이 있다. 바로 허균이다. 그는 왕수인과 양명 좌파의 하심은, 이지 및 공안파의 신문예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이들과 통하는 점이 매우 많았다.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p.185~186
주자학이 확고하게 자리잡기 이전의 조선 학계는 그다지 경색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양명학의 경우도 상당수의 유학자들이 큰 거부감 없이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육·왕을 같은 계열로 묶어 비판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더구나 사림으로부터 추앙을 받던 퇴계 이황이 양명학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비판을 가하자 이것이 곧 공의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있어서 양명학은 정통사상의 주류에 끼일 수 없었다. 이러한 이단배척의 학풍으로 인해 양명학 연구자들은 한결같이 양주음왕 · 외주내왕의 처신을 피할 수 없었다. 이황의 「전습록논변(傳習綠論辯)」은 친민설(親民設), 심즉리설, 지행합일설을 비판한 것으로서, 양명학의 주요 골자라 할 수 있는 ‘치양지(致良知)’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으로 주목된다.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아카데미, 한국철학사연구회 p.259
한편 이황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양명학 비판의 선봉에 서자, 양명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조는 “이황의 말에 의혹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그의 문인 및 후학들이 「전습록논변」에 의지하여 양명학을 비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이황과 그 문도들이 양명학을 배척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비판을 하였는데, 그 중 박세채와 한원진 등의 논변이 비교적 꼽을 만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황의 경우처럼 치양지성에 대해서 논란을 않거나 비판을 하더라도 논증이 절실하지 못하였다. 치양지설은 후일 정약용에 이르러 크게 비판을 받는다. 정약용은 ‘양(良)’이란 천연적이고 본래적이라는 의미이며 ‘치(致)’란 추천적이고 유위적(有爲的)인 것이므로, 천연적인 양지를 후천적으로 이룬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하였다.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아카데미, 한국철학사연구회 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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