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불상 한국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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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불교미술이란, 불교적인 것의 미술적 표현이다. 불교는 과거의 역사에 있어 미술적 표현을 중요시하였고, 미술에 의하여 그 자신을 표현하고, 미술적 표현에 의하여 그 자체를 이해시켰다.
불상이란 불타(佛陀)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불교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인 조형매체를 통하여 표현한 조각상이다.
백제에서 불교가 수용된 것은 4세기 말 동진을 거쳐서 온 서역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공인된 다음해에 한산에 절을 지었다 하니 이때 불상을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실제 불교의 발전은 백제가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중국남조와 정치 문화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시작된듯하다. 따라서 고구려 미술에 중국 북조 미술 위 영향이 컸다면 백제는 중국 남조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백제에서도 늦어도 5세기에는 불상이 제작 되었으리라 짐작되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고 6세기 중엽 이후의 불상만이 남아있다. 백제의 불상가운데 고대 전통을 보여주는 것으로 부여의 금동여래좌상이 있다. 두 어깨를 가진 통견의를 입고 배 앞에 두 손을 모은 선정인을 하고 장식문양이 있는 대좌에 앉아있는 모습 등이 뚝섬의 불상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얼굴에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선정에 들어 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에서 백제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백제의 조각에서 보이는 부드러운 인간미를 표현하고 있는 예로서 6세기 후반 부여군수리 출토상이 있다. 이 보살상을 둥근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의 여운이 감돌고 그 특유의 미소는 맑으면서 인간미가 넘친다.
백제 불상들의 공통점으로 모두 백제의 고토회복과 국력회복의 의지가 강한 시기에 중국과의
(금동여래좌상) 교역로와 밀접하게 관련된 장소에 세워졌다. 세 불상은 모두 중국 불교조각의 흐름을 따라갔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마애불상의 초기 예로 부채꼴 바위 면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하여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1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 불상이 있다. 하지만 백제의 태안 마애삼존불상은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 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2구의 불입상은 양감 풍부한 얼굴에 크게 번지는 미소, 넓게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장대한 체구, U자형 주름과 Y형 내의가 보이는 착의법, 도톰한 듯 날카로운 대좌의 연꽃무늬 들 세부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양식 특징을 보인다. 좌우 두 불상 사이에 끼여 있는 듯 뒤로 물러나 작게 새겨진 보살입상은 높은 관에 아무런 무늬도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원형으로 길고 통통한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원만상이며, 신체는 원통형으로 직립해 있다. 어깨를 덮어 내린 천의는 길게 내려와 무릎 부분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며 묵중하게 처리되었다. 불신의 하반부가 노출되어 백제시대의 연화대좌가 확인됨으로써 그 도상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상 요충지에 자리함으로써 6세기 중반 경 중국 복제양식 불상과의 영향 관계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며 서산 마애 삼존불상에 선행하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의 마애불상이란 점에서 국보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
(태안마애삼존불상)
지정 별: 국보 제307호
위치: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산5
시대: 백제시대
재료: 화강암
‘마애’란 ‘바위에 새긴’을 의미하고, ‘삼존불’이란 불상이 한자리에 세개가 나란히 있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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