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쿠보 도시미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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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 대하여
1. 오오쿠보 도시미치의 청년기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1830년 8월 10일 가고시마(鹿兒島)성 아래의 시모가지야(下加治屋) 町에서, 오키나와의 館付役職(유형자들을 관리하는 직책)오오쿠보 도시오(大久保利世)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이고오 다카모리, 사이고오 쓰구미찌, 오오야마 이와오, 도오고오 헤이하찌로오 등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오쿠보가와 사이고오가는 모두 성 아래 거주하는 가신집단 중 최하층에 속하는 오꾜쇼오구미(御小姓與)에 속한 하급무사의 집안으로 모두 가난하였다. 도시미치는 17세에 번(藩)의 기록소 서기보로 채용되어 따로 다소의 급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형편은 빈한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년기의 도시미츠는 오유라 소동으로 불리는 島津家의 집안 싸움에 휘말려 들게 되는데, 이것은 번주(藩主)의 후계자 다툼으로, 이 소동으로 인해 오오쿠보가는 도시미치의 아버지가 귀양을 가고 도시미치도 서기보 직을 면직당하여 근신에 처해지는 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 소동에 막부가 관여하여 오히려 사태가 전화위복되어 도시미치는 근신을 사면받아 御藏役(재정을 담당하는 직)에 임명되고, 유형(流刑)을 갔던 사이고오도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호재도 7년밖에 지속되지 않아 권력자가 다시 바뀜으로서 도시미치는 다시 면직을 당하고, 사이고오는 다시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때 사이고오는‘모든 것이 끝났다. 자결해버리자’고 까지 마음을 먹었으나 겟쇼오 스님이라는 사람이 만류하여 죽을 결심을 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이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여 새로운 권력자가 된 久光에게 접근하여 권좌에 접근할 결심을 한다. 久光은 도시미치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원수가 되는 인물이었는데도 그러한 것을 보면, 후일에 사이고오가 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음에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비해, 도시미치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사면서도 최후까지 권력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도시미치는 久光의 바둑상대였던 기쓰쇼오잉(吉祥院)의 주지인 죠오강이 자신의 동지의 형임을 알자, 그에게 접근하여 바둑을 가르쳐줄 것을 청하여 그와 친해졌다. 그리하여 기쓰쇼오잉이 국학에 관한 서적을 올릴 때 그 틈에 자신의 의견서를 끼워 넣음으로서 久光의 눈에 띌 기회를 엿보았다. 이 방법은 빠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으나 久光에게 오오쿠보 도시미치라는 이름을 각인시킬 수는 있었다. 도시미치는 또한 번(藩)의 젊은이들이 모여 만든‘精忠組’라는 조직에 속하여, 이 조직을 조종하여 久光을 동요시키는 이중의 책모를 구사하였다. 1859년 막부의 탄압에 격분한‘精忠組’의 40여명의 젊은이들은 이이타이로오(井伊大老)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도시미치는 이를 久光에게 귀띔하고, 이를 진압할 수 있는 방법을 진언하였다. 이후 이이타이로오(井伊大老)가 1860년에 암살당하자, ‘精忠組’는 이에 호응하여 폭발하려 하였는데, 이때 久光이 도시미치에게 이의 진압을 의뢰하고 도시미치가 이를 해결함으로서 久光의 신뢰를 얻게된다. 도시미치는 즉시 회계를 담당하는 小頭目格으로 임명되어 번정(藩政)에 입사하게 된다. 이후 도시미치는 나날이 久光의 신뢰를 얻으며 1861년 장군의 비서역인 오꼬난도야꾸(御小納戶役)로 까지 이례적인 승진을 하게된다. 이후 久光은 여러 귀족들과 연합해 1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공무합체(公武合)적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이때 도시미치 역시 久光을 보위하여 활약하였다. 久光가 에도에 가 있는 사이에 교토에서는 죠슈번의 천하가 되어 과격파가 횡행하여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공무합체파는 궁정에서 밀려나 있었다. 도시미치는 이에 교토로 가서 이러한 전개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죠슈파 지사들의 세력이 강해 별 소득 없이 귀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 자체가 久光에게는 높게 평가되어 도시미치는 귀국하자마자 즉시 御側役을 제수받아 중신의 반열에 들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4에 불과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런 고속승진을 놀라워 했다.
2. 삿-죠 동맹
1863년에 중요한 사건 하나가 발발하였는데, 久光가 에도에서 돌아올 때 행렬의 앞을 가로질러 가던 영국인을 살상한 일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영국 함대 7척이 鹿兒島灣에 입항하였다. 이에 사쓰마번은 영국함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른바 薩英戰爭이다. 이 전투로 鹿兒島의 5백여호가 소실되는 등 사쓰마번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 내 여론에서 양이론(攘夷論)이 자취를 감추고 개국론(開國論)이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 도시미치는 영국과의 담판을 짓는 과정에서 7만냥을 주는 것으로 합의하였는데, 이 돈은 막부에서 차입하였다. 老中 이타쿠라(板倉)가 재정 상 그만한 지출을 할 수 없다고 하자 도시미치는‘만약 빌려주지 않는다면, 내려가 영국 대리공사의 목을 벤 후 할복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여 돈을 받아내고, 영국 측과 합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쓰마번의 입장은 매우 곤란하게 되었는데, 이도쓰바시와 아이즈번은 그러한 사쓰마번의 진의를 의심하였고, 죠슈번 역시 사쓰마번을 아이즈번의 간적으로 간주하여, 모든 지사(志士)들은 사쓰마번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고 있었고, 번 내에서도 분열의 조짐이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久光의 측근인 다카사기 사타로오 등이 당시 번사(藩士)들의 신임을 받고 있던 사이고오 다카모리의 등용을 촉구하여(그는 과거 久光의 출사 명령을 거부하여 장군의 분노를 산 일이 있었다.) 사이고오는 사면되고 軍賦役으로 등용된다.
이후 죠슈파 과격분자들에 의해‘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막부에서는 이를 기화로‘1차 죠슈정벌’을 감행한다. 이에 죠슈번은 일단 굴복하였는데, 이에 막부가 자신감을 얻어 죠슈번주 부자를 에도로 소환하여 처벌하기로 결정하자 죠슈번은 이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막부에서는 죠슈 재정벌론이 대두하게 된다. 한편 사이고오와 도시미치는 막부의 부패가 극에 달해있다고 판단하고, 공무합체에 대한 생각도 더 이상 시대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죠슈와 손을 잡고 막부를 타도하는 계획을 검토하게 된다. 이에 두 사람은 죠슈 재정벌의 불가(不可)를 여러 방면으로 돌아다니며 설득하였는데(이것은 어느정도 죠슈와의 화해를 위한 공작인 듯 보인다.), 이러한 두 사람의 활동을 본 사카모토 료마가 사쓰마와 죠슈의 화해를 위하여 중재에 나서게 되어 사쓰마-죠슈는 1866년 7월 동맹을 맺게 된다. 막부는 기어이 2차 죠슈정벌을 감행하였으나, 1차 죠슈정벌이 주역이었던 사쓰마는 이미 죠슈와 동맹관계에 있었고, 따라서 막부를 지원하기는커녕 죠슈에 군수물자와 무기를 지원하는 루트를 열어주는 등 지원하였고, 막부의 2차 죠슈정벌은 참담한 패배로 끝나게 된다.
3. 메이지 신정부의 수립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도쿠가와 가는 계승하나 쇼군 직은 사퇴한다.’고 성명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이는 고조되는 무력도막의 위기상황에서 대정봉환을 통한 공의정체의 실시를 탈출구로 삼아 막부의 위력을 재건하려는 공작이었다. 이에 대하여 도시미치는 무력으로서 막부 토벌을 단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각오하고, 죠슈의 木戶, 土佐의 板垣 등과 밀계를 꾸며, 9월에는 스스로 죠슈에 가 번주 부자와 면담하고 정식으로 토막 제휴를 확인하였다. 이때 도시미치와 사이고오의 노력은 빛을 발하였으며, 이때처럼 두 사람의 호흡이 일치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鹿兒島로 돌아가 번주 타다요시를 내세워 천황기를 준비하여 3천의 군사를 이끌고 鹿兒島를 출발, 11월 23일 죠슈군과 합류하였다. 이 상경은 증기선을 통하여 신속하게 이루어졌는데, 당시에 나가사키에는 매물로 나와있는 증기선들이 많이 있었고, 이 증기선들은 도시미치에 의해서 준비되었다.
도시미치는‘왕정복고의 대호령’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극비리에 쿠데타계획을 진행하였다. 사쓰마-죠슈 연합군이 궁문을 에워 싼 가운데 12월 9일 왕정복고가 반포되었고, 다음 해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討薩表>를 교토로 보내고 다음날 1만 5천의 군사가 결집하였다. 사쓰마군은 5천에 불과해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어 전투에서 쉽게 승리를 거두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을 탈출해 에도로 도망쳤다. 오오쿠보는 2월 1일 의견서를 제출하여‘한시바삐 천하의 대병을 모아 신속히 육해군을 편성, 도쿠가와 군 추격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주장하였고, 2월 9일 5만의 대군이 에도로 진격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메이지 신정부는 에도에서의 전쟁과, 동경으로의 천도문제, 국제문제, 웅번대립 등의 용이하지 않은 산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모든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실권자는 도시미치였다. 사이고오는 당시 신정부 관료의 부패에 염증을 느껴 鹿兒島로 돌아가버렸다. 메이지 신정부가 봉착한 문제는 막번제를 완전히 해체하고 통일정권의 정치, 경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는 문제였다. 이에 따라서 오오쿠보는 막번제의 마지막 기둥인 번의 해체와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첫단계로 실시된 것이‘판적봉환(版籍奉還)’이었다. 대정봉환에서 쇼군의 세습적 지배권을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판적봉환은 번주의 영지와 영민에 대한 세습권을 부정하는 절차를 의미했다. 죠슈파 유신지사인 키도 다카요시가 죠슈 번주를 설득하였고, 도시미치는 사쓰마 번주를 설득하여, 곧 사쓰마, 죠슈, 도사, 히젠의 번주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었다. 또한 판적봉환을 발판으로 하여‘폐번치현(廢藩置縣)’이 단행되었는데, 이는 막번제적 지방제도를 완전히 탈피한 혁신적인 조치였다. 이상의 조치로 인하여 전국은 정부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신정부의 권력기반이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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