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건축과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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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누정건축과 정원
Ⅰ. 누정
1. 누정의 어의적 정의
누정의 일반적인 의미는 더위를 피하고 유흥을 즐기며 주변경관의 조망을 위해 경치가 좋은 장소에 조성되는 간단한 건축물을 뜻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 서 단독으로 건립되기도 하고, 또 궁원(宮苑)이나 제택의 정원(庭苑)에서 또는 별서(別墅)에 건립되어 정원의 일부가 된다.
누정은 누(樓閣)와 정(亭子)의 합성어이다. 한편 이러한 누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는 정자(亭子), 누각(樓閣), 누대(樓臺), 모정(茅亭), 정사(亭), 대사(臺)가 있으며 건축물의 접미사에 정(亭), 누(樓), 각(閣), 대(臺), 헌(軒), 당(堂), 재(齋), 정사(精舍)등으로 불리는 용어들도 존재한다.
2. 누정의 시작과 변천
누정 건축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처음에는 망루와 같은 건물로 지어져 성곽 주변을 감시하였거나, 또는 원두막과 같이 그 바닥을 높게 한 이른바 고상식(高床式)구조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동명성왕 10년 가을 9월조에 “난새가 왕대에 모였다” 고 하였고, 또 유리왕 22년 겨울 12월조에는 “유리왕이 왕도를 옮기려 하자 대보직(大輔職)에 있던 협부(俠父)가 이를 말렸는데, 왕이 노여워하며 협부를 관원(官園)으로 강등하였다.” 고 하였다. 이는 바로 초기부터 궁원을 관리하는 직책이 있었고, 궁원에는 누정건축이 조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고구려의 벽화고분 안성동(安城洞) 대총(大塚) 누각도(樓閣圖)에서 양측으로 담장이 둘러쳐진 간운데 우진각지붕의 누각이 우뚝 서 있음을 볼 수 있고, 또 요동성총 성곽도나 약수리 고분벽화에서는 성곽의 모서리에는 각루나, 성곽 중앙부에는 문루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때 누건축은 방어적인 시설의 하나로도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삼국사기』 고이왕 26년(259) 가을 9월에“청자(靑紫)색 구름이 궁 동쪽에서 마치 누각처럼 피어올랐다.” 는 것으로 보아 이미 누각건축이 건립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비류왕 17년 8월에는 “사대(謝臺)를 궁궐 남쪽에 세우고, 활쏘는 것을 관망하였다.” 고 하였다. 이 떄의 사대는 무술과 솬계된 건축이지만 정원과 관께된 건축존재를 추정할 수 있으며 ,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에는 장려한 궁루, 누각, 대사를 지었다., 또 동성왕 22년(500)에는 5장(丈) 되는 높이의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키웠다.
무왕은 37년(636) 가을 8월에는 망해루(望海樓)에서 잔치를 벌였고, 의자왕은 15년(655)에 궁궐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신라는 태종무열왕 2년(658) 겨울 11월에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고, 원성왕 10년(794) 가을 7월에는 궁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그리고 헌강왕 6년(875) 9월 9일에는 왕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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