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음악가 김순남의 생애와 그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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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序

Ⅱ. 1막 - 삶의 기록
1장 - 어린시절
2장 - 학창시절
3장 - 일본유학
4장 남한활동기
5장 북한활동기

Ⅲ. 2막 - 음악의 기록
1장 시기별 특색
2장 장르별 특색
본문내용
Ⅰ. 序

88년 10월 6일 서울 서대문구 예음홀. 소프라노 이일령씨가 「산유화」를 불렀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피네….” 가사는 같은 소월의 시에 곡을 붙였지만 그것은 김성태의 「산유화」가 아니었다. 50여명 남짓한 관객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또 다른 「산유화」를 숨죽여 들었다. 이 노래의 작곡가와 절친했던 음악 평론가 박용구(73)씨의 눈가에는 어느샌가 이슬이 맺혔고, 작곡가의 외동딸 김세원(45․방송인)씨는 이 날의 사건이 밎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건우와 함께 이날의 주인공이었던 김순남(1917~86)은 그로부터 21일 뒤 10월 27일 40년만에 남한의 음악계에 부활했다. 북으로 넘어갔다는 이유로 남으로부터 버려졌던 그의 작품이 다른 납․월북 음악인들 71명과 함께 해금된 것이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조심스레 연구해 온 사람들은 그 때부터 김순남에게 해방공간에서 남북한 통틀어 ‘가장 뛰어난 민족음악가’라는 칭호를 공공연히 붙이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1, 한겨레신문사, 1991, 197쪽~198쪽


소개한 일화의 주인공인 김순남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인물이다.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을 거치며 가장 뛰어난 서양음악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으레 ‘홍난파’나 ‘현제명’라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강제된 망각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이념과 체제에 희생된 월북 예술가들에 대한 강요된 망각이다. 때문에 우리는 많은 예술인들을 억지로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했고 이제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김순남 역시 지워져버린 기억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음악가였다.
김순남은 앞서 소개했다시피 88년 이른바 해금되었다. 그리고 그는 곧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민족음악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여기서 그에게 붙여진 ‘민족음악가’라는 칭호는 ‘홍난파’가 받았던 그것과는 격을 달리한다.
이 보고서는 김순남의 생애와 음악을 두개의 막으로 나누어 소개할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될 1막은 김순남의 인생 전반에 걸친 소개이다. 여기서는 전기를 쓰는 형식으로 그의 인생을 처음부터 되짚어 볼 것이다. 두 번째가 될 2막은 그의 음악, 그 중에서도 해방공간에서 작곡한 가곡과 해방가요에 대한 분석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왜 김순남이 진정한 ‘민족음악가’인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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