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126)
양화진에서 효수형에 처해지는 두 번째 죽음을 고국에서 맞는다. 김옥균 자신은 조선의 개화 및 근대국가 형성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위로부터의 개혁이란 단점과 외세의 힘을 빌리려 했던 점으로 인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김옥균의 시체에 가한 효수형은 정말 가슴아프다할 수밖에 없었다. 갑신
4페이지 | 0원 | 2004.05.19
양화진에서 효수형에 처해지는 두 번째 죽음을 고국에서 맞는다. 김옥균 자신은 조선의 개화 및 근대국가 형성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위로부터의 개혁이란 단점과 외세의 힘을 빌리려 했던 점으로 인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김옥균의 시체에 가한 효수형은 정말 가슴아프다할 수밖에 없었다.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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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楊花津)에 내침. 해군대령 올리비에가 이끄는 프랑스군, 재차 내침, 강화도 점령, 양헌수(梁憲洙) 등이 대파.1867년 서울 각 성문에서 통과세(通過稅) 징수. 신관호(申觀浩)가 수뢰포(水雷砲)를 만듦.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경회루(慶會樓) 완공.1868년 당백전(當百錢)의 통용을 명령.1869년 전라
29페이지 | 0원 | 2004.05.19
양화진) 각처에 주둔해 있던일본병은 모두 경성에 입성했다. 기병 780명, 포병 4, 5천 명, 보병 2, 3만명이 사처를 종횡하니 우리나라 인민들은 촌보의 자유도 없었다. 그들은궁성내외를 겹겹이 둘러싸서 대소관리도 출입하는 데 전율을 느꼈다.하오 2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의정부 대신
656페이지 | 0원 | 2004.05.19
양화진을 거쳐 21일 인천에 도착한 뒤 공사만 사후처리를 위해 남고 나머지는 나가시키로 떠났다. 김옥균과 서광범 등도 이 때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정변 이후 일본공사의 정변관한 사실을 덮어둔 채 공사관 소실등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조선에 전가시키는 방향으로 대한교섭을 시
14페이지 | 0원 | 2004.05.13
양화진으로 옰길 것을 청에 요구하고 일본측에도 성내의 점포 개설을 억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점포이전비를 조선측에서 마련하라는 청일의 요구조건을 재정형편이 어려운 조선정부에서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청일 의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다. 1890년 초에 청상은 80여 호에 600여 명으로 늘
21페이지 | 1,200원 | 2003.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