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가] 중국여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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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
1.당대
1.1 화예부인(花蕊夫人)(약 883-926)
1.2 어현기(魚玄機)(약 844- 약 871)
1.3 설도(薛濤)(768-831)
1.4 이야(李冶)(? -784)
2. 송대
2.1 이청조(李淸照) (1084-약1151)
2.2 주숙진(朱淑眞)(약 1131년 전후)
3. 현대
3.1 추근(秋瑾)(1875-1907)
3.2 서정(舒婷)
3.3 빙심(冰心)
참고문헌 및 인터넷 사이트
본문내용
중국 고대사회는 남자중심의 사회였고, 여성은 종속적인 지위에 처해 있었다. 기괴한 것은 국가 정국에 커다란 변고가 발생할 때마다 항상 여성을 끌어내어 주요한 책임을 지웠는데, 역사에서는 “여화(女禍)”라고 불렀다. 즉, 남성들이 일으킨 화를 여성을 끌어다가 속죄하였던 것이다. “공은 천자에게 돌리고, 죄는 부녀자에게 돌리는(功歸主上, 罪歸婦下)” 는 말이 여기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중국 고대문학 중에서 여성의 위치는 상당했다. 많은 걸출한 여류작가의 재주가 흘러넘쳐 남자에 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학작품 속 여성의 형상도 빛나고 눈부셔 남자를 압도할 만하다. 주대(周代)에 펴낸 중국 최초의 시가총집 <시경(詩經)> 3백편은 바로 “요조숙녀(窈窕淑女)”(關雎)로 시작하고 있고,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열 수 중에 아홉 수는 여성과 술을 말했다(十首九首說婦人與酒)”라는, 여성이 그의 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지적한 왕안석의 비방을 받기도 했으며, 송사(宋詞) 중에는 여성을 제재로 삼은 작품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편, 여류 사인(詞人) 이청조(李淸照)는 뛰어난 재주로 사단(詞壇)의 종주로 존숭받고 있고, 추근(秋瑾)은 “몸은 남아의 대열에 끼일 수 없으나, 마음은 도리어 남아보다 피끓는다(身不得, 男兒列; 心却比, 男兒列)”고 하며 누가 감히 문단에서 남존여비를 말할 수 있느냐는 주장을 하였다. 조설근은 <홍루몽(紅樓夢)> 제1회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평생 세속에 쫓기며 분주히 지냈건만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다. 문득 지난날 함께 노닐던 아녀자들에게 생각이 미쳐 그들을 하나하나 따져 보니 그들의 언행이나 식견이 모두 나보다 월등하지 않은가? 나는 당당한 남아로 태어나 어찌하여 치마 두른 아녀자들만 못했단 말인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참고문헌
- http://kenji.cnu.ac.kr/my/love/dongsimcho/
- http://www.muhupin.x-y.net/poem.htm
- 중국문학과 여성. 曹正文 저. 도서출판 시놀로지
- 중국 현대시와 산문. 정수국 엮음. 동양문고
- 당대여류시선. 유희재 편저. 문이재
- 이야기 중국문학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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