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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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 두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원문 제시 및 설명
◦ 함석헌 선생의 생애(성장기 및 성장 배경)

□ 본 론
◦ 함석헌 선생의 활동기에 대한 분석
- 당시 시대상 (일제강점기-군부독재)
- 당시의 주류를 이루던 사상

◦ 함석헌 선생의 활동상
- 사상계 활동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5․16을 어떻게 볼까?)
- 씨알 사상
- 기독교적 사관

◦ 함석헌 선생의 사상의 의의
- 당시에 시대조류에 미친 영향
- 한국의 간디에 비유 (김대중)

□ 맺음말

본문내용
□ 함석헌 선생의 생애 두산 Encyber에서 발췌 및 네이버 지식 검색 발췌 요약정리했음

함석헌 선생은 얼마전 폭발사고가 일어난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1901년에 태어났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를 입학했다. 그 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김혁 선생으로부터 인수하여, 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계우회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8 ·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광복이 된 후,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 ·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1956년 《사상계(思想界)》를 통하여 주로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한국기독교에 할 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효중(尹孝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 큰 화제를 일으켰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1960년 이후 퀘이커교 한국대표로서 종교활동도 하였다. 1961년 5 ·16군사정변 직후부터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 ·3선개헌 반대투쟁위원회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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