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100년 전 조선인의 눈에 비친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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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 이후 조선인의 눈에 비친 외국인과 외국문물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후 말기에 이르는 과정 속에 나타난 외국인과 외국문물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이는 이양선의 출몰 이후 근대적 시각에서만의 외국인을 다루는 것보다 좀더 폭넓고 상세한 기술을 하기 위해서이다.
조선 초기에는 여진족 출신을 비롯하여 북방민족의 등장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항왜)을 비롯 귀화한 중국인들도 있었다. 이 외에 박연, 하멜 일행 등의 네덜란드인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외국인에 대한 이러한 기록과 더불어 ‘서학’이라 불리던 서양문물에 대한 관점이 남아있다. 흔히 ‘실학자’라고 불리던 조선 후기 일부 유학자들 사이에서 ‘천문략’, ‘직방외기’, ‘천주실의’ 등의 서적이 읽혀지며 서양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 17세기 초 이후 중국에 들어가 포교활동에 종사하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에 의한 한역서양서가 조선에도 많이 전해졌다.
실학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이 이전에도 그러했듯 주자학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들을 다루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후 1839년 기해교난 때 조선에 잠입한 주교 앵베르를 비롯한 3인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처형된 적이 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하여 사고에 보존되어 있던 국보급 도서와 말굽은 등을 약탈하였다. 또한 정조가 설립한 규장각의 분관인 외규장각이 있었는데 그곳의 문헌을 약탈당했다. 이가 바로 병인양요다.
또 미국 함대가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를 침입하였다. 이가 신미양요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대원군의 강력한 양이책에 따라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의 자세를 더욱 곤고히 하였다.
참고문헌
강재언, 이규수 역, <서양과 조선>, 학고재, 1998.
국립제주박물관 편, <한국문화와 제주>, 서경, 2003.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미야케 히테요시, 김세민 외 3인 역, <조선통신사와 일본>, 지성의 샘, 1996.
김용삼, <조선 오백년 역사 대탐험>, 동방미디어(주),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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