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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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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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전쟁의 전개
-주요전투
-페르시아 전쟁 결과와 영향
-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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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대함대 건조 제안을 채택하여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함선에 탈 것을 설득, 아테네시 전면(前面)의 살라미스섬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싸워 이겼다. 크세르크세스는 곧 귀국하여 마르도니우스에게 자기의 뒤를 잇도록 하였다. BC 479년 마르도니오스는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싸워 패하였고, 같은 해 그리스 함대는 소아시아의 미칼레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 번(또는 두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번번이 실패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페르시아의 원정을 맞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잘 싸웠으나, 그리스의 도시 중에는 페르시아에 항복한 도시도 있었다. 또한 아테네 안에서도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BC 480∼BC 479년 그리스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으나, 그 후로는 아테네가 대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가, 마침내 델로스 동맹의 맹주(盟主)가 됨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마라톤에서는 중산시민(中産市民)이 중장보병(重裝步兵)으로서 활약하였고 살라미스에서 무산대중(無産大衆)이 수부(水夫)로서 활약하여, 정치적 발언력이 그들에게까지 미쳐, 아테네의 민주화를 촉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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