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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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켈트족의 사회구조
1) 켈트족의 사회, 경제 구조
2) 켈트족의 정치, 군사 제도
3) 켈트족의 사회풍습

2. 게르만족의 사회구조
1) 게르만족의 사회, 경제 구조
2) 게르만족의 정치, 군사 제도
3) 게르만족의 사회풍습
본문내용
2) 켈트족의 정치, 군사 제도

켈트족에 있어 부족은 최대의 정치단위로 하나의 연합국가, 최소 정치단위인 파구스(pagus)의 집단으로 부와 소망을 함께하고, 전쟁때에는 같은 장수를 받들고 평시에도 하나의 권위에 복종하는 조직이었다. 카이사르 저, 위의 책 p22
부족은 상층의 경우 수령의 지도와 귀족회의(원로회의)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평민(平民)들은 인민회의에 의해 참정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켈트족의 정치, 군사제도는 각 부족마다 대체로 비슷한 구조를 가졌던 것으로 보아진다. 권력은 종교적 이유보다는 재력(財力)과 사병(私兵)의 힘에 기초한 군인이나 족장들에 의해 장악되어졌으며 이런 관계로 각 부족간에는 끊임없는 전쟁과 긴장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각 부족간의 관계는 인질과 연공(年貢)의 관계로 엮어진 힘의 우위에 바탕지워졌다. 그리고 각 부족들간에는 필요에 따라 친선의 관계도 이루어졌는데 이런 친선은 유력자들간의 혼인관계나 사절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은 <<갈리아 戰記>>의 곳곳에서 확인된다.

켈트족의 유력자는 관세나 세금을 지정가(指定價)로 사들여 사재(私財)를 늘리거나 악덕고리대업자의 횡포를 피해 토지를 바치는 조건으로 보호를 요청한 피호민(被護民)의 토지를 점유하거나 고리대를 하는 방법등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이에 기반해서 사병(私兵)도 거느릴수 있었다. 카이사르 저, 위의 책 p25, 37, 38
유력자들은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전일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다른 유력자들로부터의 압박과 사기에서 보호할 의무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이런 유력자들은 서로간에 혼인을 통해 중앙권력을 분점하거나 다른 부족과 친선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갔다. 카이사르 저, 위의 책 p38
유력자들 중에서도 가장 부와 군사력이 출중한 자가 수령(首領)이 되었을 것이며 수령은 당시 켈트족 사회가 가부장적인 부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점에 비추어 세습되지는 않았을것이다. 유력자들은 도시에서 평민(平民)들에 의해 일정한 견제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갈리아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부족의 가장 유력자가 곧 수령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것이다. 아무래도 유력자들 중에서도 로마의 지시에 잘 따르는 자가 수령이 될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벨가이인 유력자가 종종 그러한 불만을 품고 카이사르에게 저항하였던데서도 잘 나타난다. 카이사르 저, 위의 책 p77


당시 켈트족에게는 유력자와는 상이한 특권계급이 있었는데 그들은 승려와 기사였다. 승려는 대부분의 평민들이 귀족들에게 예속되어 있는데 비해 희생의례를 집전하면서 종교적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승려들은 종교적 업무의 관장이외에도 각종 재판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승려들은 자기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서열이 존재하여 때로는 우두머리의 자리를 놓고 다투기도 하였다. 승려들은 세금과 병역의 의무 또한 지지 않았으며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기사는 전사집단으로 각자의 신분과 재산이 허용하는 한에서 주위에 많은 추종자와 피호민을 두고 있었다. 카이사르 저, 위의 책 p212~213


켈트족의 군사력은 도시의 무장된 평민(平民)과 유력자의 사병(私兵)으로 구성되어졌고 도시의 경우 여자와 어린이, 노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장 상태였다. 이런점은 헬베티족의 진지에서 나왔다는 표에서 확인된다. 당시 이동인구 총 37만명중 무장한 숫자가 9만2000이었다는것은 37만중의 반인 18만 정도가 성비에 의해 여자로 추정하고 나머 지 18만중에 어린이 노약자의 수를 약 반으로 추정한다면 나머지 9만은 성인남자가 추출되는 데서 알수 있다. 카이사르 저, 위의 책 p47
군대조직은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으로 이루어졌고 로마군과는 달리 공병(工兵)은 없었다. 헬베티족의 군사력은 한때 로마군을 격퇴할 정도로 강성하였다.

당시의 법률은 대개 관습법의 형태였고 헬베티족의 경우 유죄가 확인되면 화형에 처할 정도로 엄격하였다. 카이사르 저, 위의 책 p25
재판은 대체로 특권계층인 승려들에 의해 행하여졌으며 공개재판이었다. 재판은 부족간의 국경분쟁이나 재산분쟁, 각종 범죄행위에 대하여 이루어졌으며 승려의 판결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만약 승려의 판결에 불복할시에는 희생의례가 치루어졌다. 카이사르 저, 위의 책 p212


참고문헌
브라이언 페이건 著, 최몽룡 譯, <<인류의 선사시대>>, 을유문화사
카이사르 著, 박광순 譯,<<갈리아 戰記>>, 범우사
F.엥겔스 著, 김대웅 譯,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임웅, <고게르만 촌락공동체의 경제적 성격-마르크공동체를 중심으로>,<<史叢>> 제31집
E.A Thompson 著, 김양수 譯, <初期 게르마니아의 奴隸制>, <<서양 고전, 고대 경제와 노 예제>>, 고려대학원 서양고대사 연구실 編譯, 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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