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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개념

Ⅲ.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성격

Ⅳ.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연구

Ⅴ.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증언

Ⅵ.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진압
1. 4월 3일부터 4월 중순까지(진압부대 : 제주비상경비사령부, 경찰 및 우익청년단)
2. 4월 중순부터 5월 15일(진압부대 : 제 9연대, 경찰, 우익청년단)
3. 1948년 5월 15일부터 7월 23일(진압부대 : 11연대, 경찰, 우익청년단)

Ⅶ.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미국개입

Ⅷ.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제주도위원회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예부터 제주도는 ‘땅은 척박하고 민중은 가난한’ 변방이었다.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 그대로 민중의 처지는 말보다도 못했고, 중앙정부의 온갖 착취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주민중은 어떠한 중앙정부의 착취에도 외세의 침탈에도 전통적으로 부단히 저항하여 왔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하에서도 이어졌다. 일제가 식민지 경제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1912~1918)의 결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주로 일본으로 살 곳을 찾아 고향땅을 등지고 흘러들어 갔다. 제주도의 상황도 타 지역과 비슷해서, 1922년 12월 15일부터 제주-오사카 간 직항로가 개설되자 많은 도민들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기록에는 1934년 오사카 거주 제주인의 수가 5만 45명(남: 29,365명, 여:20,688명)이라고 나와 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4(당시 제주도 총 세대수 47,466호, 1세대당 1.1명 출가)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이렇게 일본으로 유출된 도민들은 민족차별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불결하고 비좁은 주거공간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여성들은 방직공장, 남성들은 고무공장, 유리공장, 공사장의 일용 노동자 등으로 처절한 삶을 이어나갔다. 1930년대에 일본에 건너가서 해방될 때까지 살았던 북촌의 한 할머니는 당시의 고된 생활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부모님을 비롯하여 열댓 식구가 오사카 동성구에 자리를 잡았어. 그때 동성구 안에는 북촌사람들이 꽤 모여 살았고, 북촌사람 상대로만 하숙을 치는 분도 계셨지. 시아버지는 덕영 가라스(유리)공장에 다니고, 남편은 메리야스 짜는 공장, 시누이는 고무공장을 다녔어. 어린 시동생들은 학교를 다니고, 시어머니는 떡도 쪄서 팔고, 탁배기도 만들어서 팔고, 쉬는 사람이 없어. 열 식구가 넘는 살림을 나 혼자 살자니 너무 고됐지. 내 남편은 그때 사회주의자였는데, 당시 일본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아서 겉으로 봐도 구별이 됐어. ‘오루바꾸(올백) 머리’를 하고 다녔거든.

그러나 이러한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도 이들은 피땀 흘려 번 돈을 고향으로 송금하였다. 그 액수도 1926년~1933년까지 8개년 간 총 730여만 엔이나 송금되어 도내 경제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이는 연평균 1백만 엔으로 매년 1인 당 40엔 꼴이며, 이 40엔은 미숙련노동자 2개월 분의 임금으로 한 달 평균 3.3엔을 송금한 셈이다). 또한 이들은 당시 오사카 지방에서 달아오르던 노동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을 하기도 하고, 직간접으로 노동운동을 경험하기도 하며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일정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제주도의 반제민족해방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현 만세동산)에서 주민 5~600 명이 모여 태극기를 동산마루에 꽂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일제의 문민정책으로 이 시기에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유림세력들은 1925년 무렵부터 상당수가 면장 등으로 급격히 개량화되어 갔다. 그러자 무정부주의운동이 일제의 개량화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20년대 후반에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정부주의운동 역시 민족해방운동으로의 가능성과 일본 급진세력과의 결합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를 우려한 일제는 급진적 아나키즘운동으로 몰아 탄압함으로써 1929년 5월의 ‘우리계’ 사건으로 그 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후부터는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이 운동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운동이 주로 소년운동․인테리운동에 국한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노농대중을 기반으로 한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 운동은 당시 일본 오사카에서 제주도에 보낸 문건인 「제주농민요구투쟁동맹」이라는 테제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제는 소년운동․인테리운동을 지양하고, 노농대중을 흡수하여 그들을 주체로 하는 운동을 벌일 것과, 일본에서의 귀환 노동자와 빈농을 주체로 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어민(잠녀 포함) 등 기층민중에 기반한 운동조직을 일으켜 세울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청년 운동가들은 1930년 3월에 ‘혁우동맹’을 결성하고, 1931년 5월에는 강창보를 책임자로 하는 ‘조선공산당 제주위원회(조공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하여 제주도 전지역의 해방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조공 제주위의 결성과 더불어 제주인들-특히 기층민중-의 반제투쟁은 격화되기 시작했다. 1931년 4월에 중면(현재 서귀포시) 농민들은 ‘납세불납동맹’을 조직하여 세금 납부와 뽕나무 묘목 강제 배포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고, 1931년 11월 7일에는 제주시 산지축항공사장 노동자 40여 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1932년 세화리 ‘잠녀항쟁’은 당시 가장 격렬했던 반제투쟁의 하
참고문헌
김상기(2008), 폭력 메커니즘과 기독교 담론윤리 구상 : 제주4·3 사건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박찬식(2012), 제주4,3사건 관련 행형자료와 형무소 재소자,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박영기(2010), 구술 자료를 활용한 역사 수업 방안 : 제주 4·3 사건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박연정(2008), 제주 4·3 사건의 문학적 재현에 관한 연구, 국민대학교
이정석(2008), 제주 4·3사건을 기억하는 두 가지 방식, 한국어문학회
현혜경(2008), 제주4·3사건 기념의례의 형성과 구조, 전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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