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 `왕오천축국전`의 서역기행과정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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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혜초의 인도 기행
Ⅲ. 혜초의 중앙아시아 및 중국 기행
Ⅳ.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2010년 12월 28일부터 2011년 4월 3일까지 국립중앙방물관, 동아일보, MBC의 주최로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때 프랑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우리나라에서 전시가 되었다.『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보관된 이후로 처음으로 외부에 전시가 된 것이다. 교과서를 통해서만 얼핏 들었었던『왕오천축국전』을 실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혜초와 『왕오천축국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많지 않다. 실제로 혜초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기도 하다. 혜초가 신라인이라고 밝혀진 것은 1915년 일본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朗)에 의해 혜초의 스승인 불공(不空)의 유서에서였다. 그 유서에는 여섯 제자가 쓰여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신라의 혜초’라고 쓰여 있다. 또한 『왕오천축국전』내의 오언시에 고국인 계림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혜초는 704년 신라에서 태어났으며 16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간다. 이 시기의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 당나라와의 관계를 위해서 당으로의 유학과 구법(求法)을 적극 권장했다고 한다. 당으로 건너간 후 광주에서 천축 밀교승 금강지와 그의 제자인 불공을 만나 사사하였다. 그리고 20대(727년으로 추정)에 천축으로 구법활동을 가게 된다. 4년여 간 천축을 다니면서 쓴 기행문이 『왕오천축국전』이다. 천축에서 돌아온 혜초는 약 50년 동안 당에서 밀교연구와 전승에 전념하고 80대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혜초가 천축을 여행하며 쓴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 Pelliot)에 의해 13세기 마르코 폴로(Malco Polo)도 통과한 곳이기도 한 옛 서역통로의 관문으로인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돈황 천불동에서 필사본으로 발견되었다.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은 책명과 저자명이 떨어져 처음에는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이 어려웠으나 불교 경전 어휘 주석집인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대해 알고 있던 펠리오에 의해 정체가 밝혀졌다. 그리고 중국학자 나진옥(羅振玉)과 일본학자 후지타 도요하치((藤田豊八)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었고 1926년 일본학자 하네다 도오루(羽田亨)에 의해 원본의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혜초의 여행 목적은 불교의 성지가 있는 오천축국의 순례이다. 혜초는 각 나라들에 대해 그 나라의 정세, 자연 상태, 풍습, 식생활, 불교 상황 등 그 나라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서술하였다. 또한 인도지역의 경우, 전반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불교 유적에 대한 설명까지 덧붙여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그 외의 지역보다 더 자세히 기술하였다.
우리는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혜초의 여행 과정을 살펴보고, 그 과정 속에서 혜초가 경험한 것들이 혜초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또한 『왕오천축국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살펴 볼 것이다.


Ⅱ. 혜초의 인도 기행
현재 전해지고 있는 『왕오천축국전』을 통해서는 혜초가 어디서 출발하였고 어떤 경로로 인도에 들어왔는지, 또한 인도의 어느 지역부터 여행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원문의 첫 부분에서 인도의 동쪽지역인 폐사리국(바이살리)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과 이후 혜초가 인도의 중앙으로 이동하는 것을 볼 때, 혜초는 당나라 남부 항구도시인 광주(廣州)에서 배를 타고 인도로 들어가 동천축국부터 여행을 시작한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폐사리국에 당도한 혜초는 가장 먼저 삼보를 공경하지 않는 외도(外道)의 모습을 보게 된다. 폐사리국은 자이나교를 크게 일으킨 마하비라의 출생지로서, 자이나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혜초가 이곳에서 본 외도는 자이나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한 달 뒤에 혜초는 구시나국(쿠시나가라)에 이르게 된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성지이지만 당시의 성은 황폐화 되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혜초의 다음 행선지는 피라날사국(바라나시)이었다. 이곳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을 하신 곳이다. 부처님이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이를 기념한 탑을 볼 수 있다. 혜초는 이 나라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고병익, 『혜초의 길따라』, 동아일보사, 1984.
김규현, 『혜초따라 5만리(상),(하)』, 여시아문, 2006.
장석만 외 6인, 『세계종교사입문』, 청년사, 1991.
정수일 역,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 2004.
지안 역, 『왕오천축국전』, 불광출판사, 2010.

논문
김복순,「혜초의 천축순례 과정과 목적」, 한국인물사연구소, 2007.
박기석, 「혜초 <왕오천축국전> 의 기행문학적 고찰」, 『고전문학과 교육』12,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1996.
서윤길, 「밀교의 교학적 위상과 그 특성」, 『한국불교학』 20, 한국불교학회, 1995.
정병삼,「혜초가 본 인도와 중앙아시아」, 동국대학교사학회, 2010.
정수일,「혜초의 서역기행과 『왕오천축국전』」, 동국대학교 국문학 연구소, 2004.
정수일,「혜초의 서역장행 일고 – 대식역방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6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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