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언론상황과 장지연의 친일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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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1910년대 언론상황
1. 시대적 배경
2. 총독부 일간지
3. 3.1운동과 지하신문

Ⅱ 장지연, 그리고 친일행적
1. 장지연의 생애
2. 장지연의 활동
3. 장지연의 친일 행적

본문내용
Ⅰ1910년대 언론상황

1. 시대적 배경
1910년 7월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대한제국의 병합에 착수했다. 수상 이완용은 데라우치에 호응하여 국무회의를 거쳐 8월 22일 한일합방에 관한 조약에 서명 조인했다. 통감부는 일본 군대와 헌병을 풀어 삼엄한 경계망을 펴게 한 뒤 8월 29일 이른바 한일합방을 공포했다. 통감부 대신 총독부가 들어섰고, 합방을 성사시킨 데라우치 통감이 초대 총독을 맡았다.
합방 직전 언론 통제 - 1910년 7월 통감부는 우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대한신문>, <대한민보>, <국민신보>, <대한일일신문>의 신문사 사장과 발행인을 불러 신문검열을 강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형식상으로 대한제국 내에서 관장하던 신문검열을 경찰력을 가진 통감부가 맡기로 했으며, 조선어 신문이 인심을 선동하는 기사와 비분강개조의 논설을 엄금하는 동시에 범법자에 대해서는 치안방해죄로 엄중한 처벌을 한다고 하였다. 또한 시사문제에 관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을 “의병”으로 부르고 이들을 선동하거나 은연 중 동정하는 내용을 보도하지 말 것, 한일관계를 소원케 하는 기사, 일본의 조선 침략에 저항하는 내용의 기사 등을 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합방 후 언론 통제 - 1910년 8월 30일 한일 합방이 강제로 체결되자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는 조선의 언론계를 식민지 통치에 유리하도록 개편하기 위해 [신문통일정책]을 강행했다.
1910년 5월에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하고도 비밀에 부쳐 온 일본은 8월 30일자부터 이 신문의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꾸어 총독부 국문판 기관지로 발행했다. <황성신문>은 8월 30일자부터 <한성신문>으로 개제하였다가 9월 14일자까지 내고 종간했다. 대한협회(1907년에 창립된 정치단체)의 기관지적 성격을 지녔던 <대한민보>에 대하여는 이 신문의 소장 논객인 이종린을 비롯한 28명을 예비 검속(엄중하게 단속함)하여 사설을 쓰지 말 것과 연설을 하지 말 것을 강요한 후 합방조약 공포 이후에 석방했다. 이 신문은 8월 30일자부터 <민보>로 나왔으나 31일자를 끝으로 폐간했다. 총독부는 친일지 역시 발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완용 내각의 대변지였던 <대한신문>도 8월 30일자로 <한양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31일자를 내고 종간했다.
이에 앞서 통감부는 그 동안 한국 침탈의 선전 매체로 활용해 온 일인 경영의 신문에도 손을 대 서울에서 발행되던 일인 신문을 모두 정리했다. 1910년 6월 하순부터 8월 상순에 걸쳐 <대한일보>, <조선일일신문>, <조선일출신문>, <경성신보>, <동양일보> 등 일인이 경영한 국문지와 그밖의 일문지를 강제로 사들여 폐간 조치한 것이다. <경성신보>의 경우 끝까지 신문 팔기를 거부하자, 이 신문이 사회주의 기사를 실었다 하여 발매를 금지하는 등 압력을 가해 마침내 굴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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