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머리말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로 서술한 책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설화를 포함한 삼국유사에 비해 사실에 충실한 기록을 하고 있는 삼국사기지만 삼국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있다.
고대 국가에서 종교는 큰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정이 확실하게 분리된 고려와는 다르게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 건국신화가 있었고 이를 통해 지배자를 신격화시켰다. 그 결과 건국자를 신격화하는 단계에서 사실적인 기록, 즉 고려의 왕건이나 조선의 이성계에 해당하는 기록 부분이 없어 2차 기록 단계였던 삼국사기 편찬 시에 신화를 넣었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삼국의 신화 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건국 신화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백제의 건국신화를 유심히 보게 되었고 건국신화에서 주제를 찾아내 써보려고 한다.
백제시대(백제)의 역사1. 한성시대(漢城時代) BC18-AD475온조(溫祚)가 서기전 18년에 하남위례성에 작은 부족국가인 백제를 세웠다. 백제 초기의 지배계급은 북에서 남하(南下)한 유 이민(流移民)의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한 사람들이므로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다. 초기 백제의 도읍지는 한강 유역인 바 서울 풍납동 토성내(風納洞 土城內)는 소위 김해식(金海式)토기와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유적층이 조사 확인되었다. 백제가 마한(馬韓)의 여러 부족국
풍납토성을 『삼국사기』백제본기 책계왕 원년(286)에 보이는 백제시대의 사성(蛇成)으로 비정함으로서 풍납토성은 백제왕성으로 비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 버렸다. 이후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이에 방치되고 있다가 1970년대에 와서 서울시의 도시개발과 더불어 풍납토성 내부가 시민의 주거지로 변모해 갔다. 그런 가운데 1997년 1월 초, 풍납토성의 실측조사를 실시하던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학술조사단(단장 : 이형구)이 풍납동 231-3번지
풍납토성 실측조사 도중 토성 내부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백제토기 등 유물을 발견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을 계기로 풍납토성에서는 백제 한성시대의 역사를 새로 장식할 만한 중요한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게 되었다.Ⅱ. 백제 건국지로서의 위례성백제 도성 연구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매우 중요한 문헌자료이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풍납토성은 그 위치나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서 볼 때, 초기 백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토성이다.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백제의 성립 시기와, 왕권 확립시기, 하남 위례성의 위치 등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는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참고문헌】․『風納土城Ⅲ』한신대학교 박물관, 2003․『중원문화논총 4권』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0․『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김태식, 김영사, 2001․『백제연구 36권』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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