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와 역사] 기후와 역사 - 여몽 전쟁(1231~ 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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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서론:

전개:

여몽전쟁의 기후, 지리학적 요인:

서양과의 비교:

결론:
본문내용

3차 - 2차 침입으로부터 3년 뒤인 1235년, 동진국을 쳐부수고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고는 중국 대륙 남쪽에 있는 남송을 치는 길에 당율태를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따로 보내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지난번 침입 때까지는 백성들과 천민들이 군사들과 함께 용감하게 싸워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백성들은 이내 고려조정에 등을 돌리게 된다. 그 무렵인 1239년 항복을 기다리던 몽고군도 제풀에 지쳤는지 고종이 몽고에 찾아가 황제를 뵙겠다고 약속하자 몽고군은 물러가며 끝을 맺는다. 3차 침입 때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불심으로 몽고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4차 - 고종이 몽고황제를 만나겠다는 약속을 어기자 몽고의 정종은 다시 군대를 보낸다. 적장 야굴은 동주(철원), 춘주(춘천), 양근(양평), 양주 등지로 군사를 몰아 성을 쳐부수고 충주에 이르러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시 충주성의 성주는 지난번 살리타를 죽인 김윤후였다. 김윤후는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노비들과 충주성을 방어하였고, 충주성을 공격한지 2개월이 되도 차도가 없자, 야굴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돌렸다. 고려조정이 끈질기게 버티자, 기다리다 지친 야굴은 왕자라도 보내면 군사를 돌리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고려가 왕자 창을 보내자 야굴은 몽고로 돌아가게 된다.

5차 - 1254년 몽고는 다시 5차 침입을 감행했다. 차라대는 충주성을 다시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충주성은 김윤후의 활약으로 방어에 성공한다. 이에 분노한 차라대는 20만 명이 넘는 백성
참고문헌

출처: ‘한국의 기후와 문화: 한국의 기후의 문화 역사적 연구’ 김연옥 1985
학술논문 ‘고려시대의 기후환경: 사료분석을 중심으로’ 김연옥 1984
‘기후와 역사’ 하버트 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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