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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풍수(풍수지리사상)의 명칭

Ⅱ. 풍수(풍수지리사상)의 흐름

Ⅲ. 풍수(풍수지리사상)의 목적

Ⅳ. 풍수(풍수지리사상)의 비보
1. 황룡사의 구층탑
2. 안동의 고찰고탑
3. 충주의 중앙탑

Ⅴ. 풍수(풍수지리사상)와 땅의 기운
1. 잠을 자보는 방법
2. 꿈
3. 바위나 암반이 묻혀 있는 경우
4. 우물

Ⅵ. 풍수(풍수지리사상)와 서울

Ⅶ. 명풍수 도선대사의 사례(설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풍수(풍수지리사상)의 명칭
고대 중국에서는 그 생활 상 바람(風)과 물(水)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되었다. 한랭한 북풍은 북중국 일대를 공포에 싸이게 했고, 비를 머금고 불어오는 남풍은 남중국의 하천을 범람시켰다. 북풍을 막아 유수(流水)를 경계 짓는 일은 고대 생활에서 중대한 사항이 있다. 거처를 안정시키고 삶을 즐기려면 우선 첫째로 바람과 물의 화(禍)를 입지 않을 만한 땅을 고르고, 집을 잡아야만 했다. 그래서 토지를 선정하는 필수 요건에서 바람과 물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토지를 점쳐 정하는 것은 풍수관(風水觀), 지상(地相)을 보는 것도 풍수를 본다고 했다. 주택이든 묘지이든 지세나 지상을 보는 모든 행위를 풍수라 불렀다. 이후 상지법(相地法)이 묘지나 주택에 한정됨에 이르러 풍수라는 말도 이 양자에 한정되게끔 되었다.
이렇게 볼 때 풍수란 명칭이 지리설의 통속명으로 쓰인 것이 자명해 진다. 일반 민중들은 상지(相地)를. 풍수를 보는 것, 즉 풍수라고 생각해왔다. 훗날 지리가(地理家)들이 권위를 갖추기 위해 <지리설> <감여> 등의 문자를 사용했지만 그들 지리가 사이에서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통속적으로는 상지를 풍수로 보는 관습 때문에 지리설도 상지법에 지나지 않으므로 일반에서는 풍수라 통용되었을 것이다.
만약 풍수가 <장풍득수(葬風得水)> 등 장경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면 문자를 모르는 일반 민중이 이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터이고, 따라서 많은 문맹자까지 널리 이야기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장경의 저자 곽박이 장법의 원칙으로서 제창한 <장풍득수>도 실은, 예로부터 중국 민간에서 바람과 물을 관찰하여 땅을 고르던 습관을 차용하여 상지법의 원칙을 삼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 우영재(2002), 대권과 풍수 - 地氣를 해부하다, 관음출판사
○ 조해식, 영남 사대 길지마을의 풍수지리적 고찰
○ 최창조(1984),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 최창조(1992),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 서해문집
○ 최원석(1992), 풍수의 입장에서 본 한민족의 산 개념 : 천산, 용산, 그리고 인간화, 지리학논총 19
○ 최영주(1994), 신 한국풍수, 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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