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사회학] 재일교포 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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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북송, 그리고 재일교포

제 1 장 들어가는 말

제 2 장 재일교포
1. 역사적 배경
2. 법적 지위
3. 재일교포의 현주소

제 3 장 북송
1. 북송
2. 북송의 요인
3. 북송의 결과

제 4 장 현실
1. 북송 된 재일교포의 현주소
2. 해결방안

제 5 장 결론


본문내용
4) 조총련계 재일교포의 문제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에 관한 협정은 일본 정부와 대한민국간의 협정이므로 일본 내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 가운데 국적이 한국으로 되어있는 교포들만 해당되는 조약이다. 따라서 국적이 조선으로 되어 있는 많은 동포들 특히 조총련계 동포들은 여전히 무국적자일 수 밖에 없었다. 협정영주권의 전제가 한국적을 가진 교포들만 인정된다는 한계를 지녔기 때문에 조선적을 가지고 있는 동포들과 한국 국적을 가진 동포들 사이의 이념의 불화를 조장하였고 조선적을 지닌 동포들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차별적 대우도 막을 수 없었다. 1982년 체결된 난민협약을 일본도 수용함으로써 조선적 재일교포도 특별 난민의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나 여전히 조선국적을 가진 재일교포들은 여전히 불안한 법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

3. 재일교포의 현주소
현재 일본 내 거주하고 있는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의 수는 60만 명 가량 된다. 이는 재일교포를 협의의 정의로 보았을 때의 그 수이며 광의의 재일교포를 본다면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혈족이 한국이나 조선인 경우, 부모 중 한쪽이 재일교포의 자식인 경우와 일본에 귀화한 경우와 그 후손들을 포함한다면 그 수는 대략 20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될 수 있다. 인구 수로 비교해 본다면 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할 지도 모를 재일동포들에 대해 현재 우리 정부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한편 그들은 일본 내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앞서 말했지만, 재일교포와 재미교포를 이야기 한다면 이 둘은 굉장히 많은 의미로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우선 그들의 거주 국가가 다르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교포들을 볼 때 매국노라고 욕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겉은 우리와 같은 아니 우리보다 더 한국인 같이 생긴 재미교포들의 어눌한 한국어나 아예 영어를 쓰는 등의 행동을 볼 때면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매국노라 욕하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귀화를 한 재일교포들을 볼 때 민족적 자존심, 자긍심도 없는 역사도 모르는 매국노라 욕한다. 과연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으며 도저히, 살기 위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국적을 바꾼 그들에게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죄인이 아닐까? 그 나라에 산다면, 일시적 유학이나 취업이 아닌 영구적 거주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상식이다. 재미교포들의 국적이 미국인 것과 재중교포들, 즉 조선족의 국적이 중국인 것과 재일교포와 마찬가지로 일제시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그곳에 뿌리내리며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국적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그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국가의 국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의 국적이 다른 나라의 국적으로 되어 있는 이는 극히 드문 경우이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일교포들의 귀화를 접할 때 마다 배신감에 어쩔 줄 몰라 한다. 도대체 재일교포들은 왜 한국과 일본 양국으로부터 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그들의 처지는 과연 어떠한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때 정대세의 눈물을 기억하는가? 그 눈물이 바로 지난 60년 간의 재일교포들의 처지와 지금 현재의 그들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가장 정확한 답변일 것이다.
해방 직후 재일교포들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처지나 다름 없었다. 북한도 1951년 한일회담 개최 후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에 관한 구체적 협약이 나오게 되는 1954년 까지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남한의 경우 재일교포들의 법적 지위에 대해 협상하는 척 했지만 그들의 가장 필요한 부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평등한 지위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재일교포들은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지금 이렇게 발전된 현대 사회에서 인권이라는 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는 일반인들이 생긴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박탈감에 시달렸을 지 모른다. 재일교포들의 교육과 직업을 살펴보면 일본인들과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학교를 나와도 취업률이 훨씬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운동선수로서 재일교포들의 상황 또한 굉장히 힘들다. 어느 국가에서도 뛰지 못하는 그들은 운동선수로서의 이룰 수 없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조국이라 생각하는 국가에서 뛸 수 없는 그들의 상황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우리는 그래서 귀화하는 그들을 욕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에는 굉장히 배타적인 일본의 국적법도 한 몫 했음을 알 수 있다.
귀화했지만 우리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온 추성훈은 한편으로는 조금은 관대해진 재일교포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추성훈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로 많은 귀화한 운동선수 혹은 사회의 약간은 힘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우리의 냉담한 반응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이 그 정도의 위치를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렸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그들의 국적만을 보고 우리는 판단하는데 이는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고인지 모른다. 국적이 그 사람을 말해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국적은 단지 국적일 뿐이다. 그의 자아와 정체성을 대변해 주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편의상 국적을 귀화했더라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한국을 위해 살아가는 재일교포인 일본인과 국적은 한국이나 한국에 적대적 감정을 가진 재일한국인 이 두 부류와 함께 재일조선인, 즉 북한 측 국적을 가진 동포도 다 우리가 도와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데올로기를 따지기는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데올로기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이제는 너무 구시대적 사고이다. 또한 재일조선인들 모두가 조총련계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이제 알 필요가 있다. 일본에 우호적이고 미국에 종속된 남한을 보며 조선국적을 지킨 그들은 북한을 선택한 것이 아닌 통일을 염원한 사람들이다. 해방 직후 3.8도선의 경계가 그어진 조국을 보며 식민지 시절만큼이나 혼란스러워 했던 재일교포들은 조선이라는 국적을 지키면서 그들의 통일된 조국을 기대하고 희망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들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부정하는 일이 되어 버리게 된다. 따라서 재일한국인 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 재일조선인들까지도 안을 수 있는 정책이 나와야 하고 또한 우리도 그러한 시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극우 세력이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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