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인들의 생활상 -무용총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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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 론 : 고분벽화의 특성

2. 본 론
1) 고구려 고분벽화의 분류
① 지역에 따른 분류
② 주제에 따른 분류
③ 시기에 따른 분류

2) 고구려인들의 생활상
① 의복
② 식생활
③ 주생활
④ 무용과 음악
⑤ 놀이
⑥ 수렵

3) 무용총

4) 무용총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살펴본 고구려인들의 모습
① <수박도>
② <가내접객도>
③ <무용도>
④ <수렵도>

3. 결 론

본문내용
⑤ 놀이
고구려의 놀이에는 각저 ․ 수박 ․ 마사희 · 공 던져받기 ․ 바퀴 던져받기 ․ 나무다리걷기(대말타기) 등이 있다. 이처럼 다양했던 고구려의 놀이문화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각저 등의 힘겨루기 놀이와 대말타기 등의 재주부리기 놀이로 나뉜다.
힘겨루기 놀이로는 각저와 수박이 있다. 허인욱, 『(옛 그림에서 만난)우리 무예풍속史』, 푸른역사, 2005, Pp.296~297.
각저는 씨름과, 수박은 태견과 유사한 놀이로 일상생활 장면의 표현 이외에도 장의행사의 일환으로 행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전호태,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Pp.51~52.
고구려에서도 씨름이 장의행사의 일환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한다. 각저총 벽화의 씨름과 주변제재를 살펴보면 씨름은 현실세계에서 행해지는 놀이가 아니며, 새로운 세계의 입구에서 행해지는 의미 깊은 행사라고 한다. 씨름이나 수박희는 죽은 자가 타계로 들어가는 과정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수산리 고분 널방 서벽>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마사희>
<다양한 놀이가 담긴
장천 1호분 벽화>
재주부리기 놀이로는 마사희, 공 던져받기, 공과 막대기 던져받기, 바퀴 던져받기, 나무다리 걷기 등이 있다. 우선 마사희는 말 위에서 하는 놀이로 마상재, 마희, 농마희, 말광대라고도 한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사희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마상궁술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이사부가… 마희(馬戱)로써 가야를 속여 취하였다.” “異斯夫… 以馬戱誤加耶 國取之” 『삼국사기』권 제44 열전 제4 이사부
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마사희가 신라에서도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농마희라는 이름도 보이는데 高麗史 권18 毅宗22년 4月 乙巳. 고려 의종 22년(1168) 부벽루에 나가서 신기군의 농마희를 구경하고 백금 두근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농마희 역시 마사희로 볼 수 있으며 신기군의 마사희를 시험했다는 구절에서 마사희가 고려의 기병부대에서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마사희의 발전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인 농환은 고대부터 아시아권의 중국, 한국,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권에서도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일찍이 고대의 이집트에서도 매우 대중적인 놀이로 애호되었다. 고승길, 「고분벽화에 묘사된 고구려의 곡예와 아시아의 곡예」, 『연극연구』, 1996, Pp.221~224.
신라에서는 금구 ․ 금환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고 초기에는 공을 던지고 받다가 이후에는 공과 막대기를 엇갈려 던지고 받는 놀이로 발전했다고 추정된다. 나무다리 걷기는 대말타기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나무나 참대로 만든 긴 다리에 올라서서 걷는 놀이로 중국과 일본에서도 성행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에서도 죽마(竹馬)놀이가 있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죽마, 또는 고교, 고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수산리 벽화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이러한 놀이들은 민중들 사이의 놀이에 그치지 않고 귀족들까지도 유흥거리의 일환으로서 즐겨하였다.

⑥ 수렵
수렵활동은 고구려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렵은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의 일부였다. 고구려 영토에는 산악지대가 많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수렵은 농업만으로는 부족한 식량을 보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삼국지』에서는 고구려의 생활환경을 “(그 곳은)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야나 못
참고문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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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書』 권 54 <동이열전> 제48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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