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실록과민간역사] 조선시대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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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왕실 여성들의 삶
2. 양반 여성들의 삶
3. 평민 / 천민 여성들의 삶
4. 특수직 여성들의 삶
본문내용
2. 공주의 삶
조선왕조 500년간 재위한 왕은 27중에서 38명의 공주와 78명의 옹주 총 116명의 왕의 딸이 있었다. 국가권력의 핵심인 왕을 아버지로 둔 조선공주(옹주)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화려한 옷차림과 수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부와 명예를 움켜 쥔 채 평안한 삶을 살았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실록에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공주(옹주)가 있고, 정치적 희생물로 전락하여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공주(옹주)가 상당수 존재했다. 왕의 딸이란 이름은 그녀들에게 축복인 동시에 불행의 씨앗이기도 했다. 수많은 공주들 중 이 책에서는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7명의 공주(옹주)들의 삶을 간추렸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공주(옹주)라 하면 최근 그녀의 불행한 삶이 주목 받고 있는 ‘덕혜옹주’이다. 고종의 사망과 함께 일본으로 인해 강제로 유학을 가게 되어 이후 귀국하지 못한 채 정신병을 얻어 평생을 우울한 암흑기 속에서 보낸 옹주의 삶은 유명하다. 이 밖에도 영조의 딸 화완옹주, 태종의 딸 정선공주, 문종의 딸 경예공주, 선조의 딸 정명공주 등의 삶을 보면 공주의 삶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국익을 위해서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무 잘못 없이 단지 왕의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노비로 전락하는 순간까지 겪게 되고, 남편까지 잃어야 하는 희생을 당한 것이다.
그녀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 세자를 제외한 왕자군과 공주, 옹주들은 3~4살이 되면 궁궐 근처에 새로 지은 '제택'과 노비, 각 제택을 유지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토지를 하사 받았다. 12살 즈음이 되면 혼례를 지러 궁 밖으로 처소를 옮겨 살아야 했다. 즉, 동궁으로의 이거는 처음부터 원자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왕자와 공주, 옹주들은 동궁에 기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주나 옹주는 태어나면 혼인을 하기 전까지는 궐에서 자라며 생활한다.. 모든 생활을 궐 안에서 합니다. 때때로 특별한 날에 궐 밖에도 나아가 세가의 구경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혼인을 하면 남편(부마)의 사가로 하가 하여 일반 사대부가의 여인네와 동일한 삶을 살게 된다. 물론 궐에 자주 들어와 임금과 중전에게 문안을 드리며 또한 내명부 들과도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반대로, 이와 같은 공주와 옹주의 삶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관점과는 달리, 공주와 옹주의 삶을 불쌍하게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시집 가서도 왕녀라는 이유로 시집에서 매우 대우를 받으면서 살게 된다. 일반 여자들에 비해서 시집살이도 없고, 부마는 첩을 들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시앗 걱정도 적었다. 부마가 첩을 들일 경우에 부마는 큰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정식으로 첩을 들일 수는 없어도 바람은 필수 있으니 그 정도의 마음고생은 있었겠지만, 부마는 왕녀인 아내가 먼저 죽어도 재혼을 할 수 없었고 만약 재혼을 하더라도 그 부인은 첩으로 취급된다. 게다가 남편의 집안, 즉 시가가 대역죄를 지어 몰락한 경우에도 왕녀의 신분은 보장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조선시대의 왕녀들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평생 동안 왕의 딸이라는 이유로 지위를 보장받고 살았던 것이다.

3.궁녀의 삶
궁녀란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궁녀는 500-600명에 이른다. 그녀들의 최고 보수는 오늘날로 치면 150만원 정도이다. 그들은 여성에게 관직의 길이 막혔던 시대에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었다는 것이다. 왕과 신하가 만나 정사를 논하고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이 생활했던 궁궐 궁녀들이 존재했다.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 왕과 왕비가 함께 잠잘 때 옆방에서 숙직을 섰던 방, 바느질이나 빨래를 하던 곳 등이 궁궐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궁녀들은 또한 궁 안의 또 다른 실세로 지위를 갖기도 했다. 왕을 보좌하는 상궁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 영향력도 커서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재산을 관리했던 상궁의 권한도 막강했다. 또한 문자 교육을 못 받은 대비들 옆에서 문서관리를 하던 궁녀들도 상당한 실세로 활동했다. 궁녀들은 주로 일상 생활과 관련된 일을 했는데, 각각의 역할에 따라 소속 부서가 나뉘어 있었다. 왕의 침실을 담당하는 '지밀'은 왕과 왕비의 신변 보호 및 일체의 시중과 내전의 물품 관리 등을 담당했다. 그밖에 의복을 만들고 수를 놓는 '침방'과 '수방', 식사를 담당하는 '소주방', 음료 및 과자 등을 만드는 '생과방', 빨래와 옷의 뒷손질을 맡은 '세답방' 등에서 궁녀들이 일을 했다. 궁녀들의 품계도 궁녀들이 일하는 곳에 따라 그리고 근무했던 연수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나뉘었다.
정식 나인이 되기까지
입궁 후 15년 정도 엄격한 교육을 받으면 정식 나인이 되어 업무를 맡게 된다. 입궁 나이는 부서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4-5세부터 13세까지가 일반적이었고 부서의 격이 높을수록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궁녀로서의 교양을 쌓게 된다. 입궁한 아기 나인들은 소속이 정해져 있었으며 그 부서의 선배 상궁이 맡아 양육했다. 지밀의 경우 4-5세에 입궁하여 7-8세 무렵부터 궁녀로서의 몸가짐과 궁중 용어를 배우고 글공부를 했다. 침방, 수방의 경우는 6-8세에 궁에 들어와 주요 임무인 바느질과 수놓는 방법을 연습하였다. 예의범절을 따로 교육받지 않고 생활 속에서 익혔고, 글공부는 소학 언해본을 읽는 정도였습니다. 이밖의 소주방, 생과방, 세답방의 견습 나인들은 각자 맡은 기술 습득이 주요 교육내용이었습니다.
궁녀에도 격이 있었다는데
왕과 가까이 하는 지밀이 가장 높은 부서였고, 침방과 수방이 중간 정도, 소주방, 생과방, 세답방은 상대적으로 낮은 부서였다. 또한 일반 궁녀들의 지도자격인 상궁이 있었는데, 누구나 상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궁에 오르려면 견습 나인에서부터 시작해서 30년 내지 35년이 걸린다. 상궁 중에도 간부가 있었는데, 바로 궁녀의 대표인 제조상궁인데, 제조상궁은
참고문헌
<출처>
<규장각 교양총서 2 – 조선 양반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2009
<한국여성사> 최일성 지음, 백산자료원, 2006
<우리 여성의 역사>, 한국여성연구소 여성사연구실 지음, 청년사, 1999
<조선시대 조선사람들>, 이영화 지음, 가람기획, 1998
<조선왕비 500년사> 편집부저, 태동출판사, 2008
<궁녀 (궁궐의 꽃)> 신명호저, 시공사, 2004
<조선왕비실록 - 숨겨진 절반의 역사 >,신명호 지음,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2007년
<조선시대 궁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박영규 선생님의 우리역사 넓게보기 3) 왕실의 의식주에서 왕손의 양육까지 궁궐의 살림꾼, 궁녀 이야기> 박영규(소설가) 저, 김영사, 2010
KBS 역사스페셜 67회 – 조선시대에도 자유부인이 있었다
KBS 역사스페셜 83회 –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KBS 역사스페셜 168회 – 조선시대 여인은 어떻게 살았나?
KBS 한국사 23회 –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
EBS 다큐프라임 한/중/일 궁중생활사 1부,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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