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사] 일제강점기의 언론사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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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I. 서론
II. 이광수의 사상적 배경
III. 이광수의 민족주의
IV. 이광수의 언론관
V. 이광수의 언론인으로서의 행적
VI.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의 이광수
VII. 조선일보의 탄생
VIII. 경영진의 변화와 민족지 조선일보
V. 방응모의 등장과 조선일보의 변화
VI. 조선일보의 친일행각
VII. 결론
VIII. 자료 출처
본문내용
III. 이광수의 민족주의
25살이 되던 1916년, 이광수는 와세다 대학 대학부 문학과 철학과에 입학했고, <매일신보>의 요청으로 “동경잡신”과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인 “무정”을 집필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때 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병원에서 앞서 말했던 허영숙과 만나게 되어, 결국 백혜순과 이혼하고 허영숙과 베이징으로 애정도피를 하게 되었다. 12월에는 재차 도일하여 조선청년독립단에 가입하였고, 이듬해 도쿄 유학생들의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해로 탈출하였다. 당시 상해에서는 도산 안창호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독립>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된 이광수는 도산의 홍사단 이념에 감명받아 그를 보좌하여 “독립운동방략”을 초하기도 했다.
이렇게 2년간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던 이광수는, 도산이 극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1921년 4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던 중에 체포되었다. 무려 <독립> 사장이었던 이광수가 재판도 없이 곧 석방되자, 그가 변절했다는 소문에 비난이 빗발쳤다. 거기에 더해 그 해 9월에 당시 총독 사이토와 첫 만남을 가졌으며, 11월에는 <개벽>에 현재도 회자되는 “민족개조론”을 익명으로 기고하였다. 이 “민족개조론”은 그가 민족이란 개념을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파악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우선 ‘민족은 운명이다’라고 전제하는 운명론적 관점에서 민족을 의식했으며, 민족의 본질적 요소로서 혈통과 성격기조, 즉 민족성, 그리고 언어와 문학을 포함한 문화를 들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의 발원지가 해외 동포, 즉 상해 홍사단 운동의 지도자 안창호이며, 우리 민족은 근본적 성격은 좋지만 부속적 성격이 좋지 못한 경우에 해당되며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서 부정적으로 굴절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목적의식적으로 고등 민족으로 진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부정적으로 변질된 민족성을 다시 새롭게 개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근대화를 지향했던 이광수의 민족주의는 자연히 전통문화와 기존질서에 대한 비판과 변혁에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했다.
전통과 근대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는 비단 이광수뿐만이 아닌 그 당시 서구 문화를 선구적으로 접한 일부 근대주의자들의 동일한 사상체계이기도 하였다. 외래 문화 수용에 있어 비판적이고 주체적인 수용의 태도야말로 민족 문화의 자주성을 고양하는 데 중대한 관건이 되는데, 이광수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비판적이고 주체적인 외래문화 수용의 태도를 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그는 근대지향, 즉 서구화를 통하여 민족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급진적 개혁론자였으며 문학은 근대화의 효과적인 선전도구여야 한다고 여겼는데, 이러한 자세는 훗날 언론에 대한 그의 태도에도 적용된다.

IV. 이광수의 언론관
조맹기(2006)에 의하면 이광수는 언론인은 천직이며, 사상을 강하게 하고 민심을 통일하는 것이 역할이라 믿었다. 그는 신문을 선전하는 기구, 선전의 조직으로 여기고, 재력이나 군대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졌다고 보았다. 또한 1919년 8월 21일 <독립>의 창간사에서는, "신문의 사명은 “독립사상 고취와 민심통일, 독립사업과 사상을 우리의 신문으로 하여금 전파하고, 유력한 여론을 환기하고 정부를 독려하여 국민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문명 국민에게 불가결한 신학술과 신사상을 소개하고, 국민의 국사(國史)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개조 또는 부활한 민족으로서 신국민을 이끄는 데 노력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당시 그는 문화적 규범과 믿음을 갖지 못한 조선인들을 엄격한 도덕적, 정신적 개조를 통해 개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즉 정신생활이 거의 정지해 있는 개인을 되살아나게 하는 데 언론이 핵심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상사태에 처한 조선이 살아나기 위해서, 독립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실력을 키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 방법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근대화와 서구화라고 믿은 결과, 그는 항일독립운동이 무지하고 무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광수는 영웅보다는 정치기관, 경제지관, 교육기관, 그 외 사회 모든 기관을 유기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즉 조직인이 더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직의 계획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언론사의 관료제 원리 도입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당시만 하더라도 생소한 운영 방법이었다. 그러나 조직 내에서는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효율성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러한 운영 방식 아래에서 기자는 ‘윤리의식’, ‘기자정신’을 상실할 수 있다. 김현주(2005)에 따르면 이광수는 “교육가 제씨(諸氏)에게” 라는 글에서 ‘사회’에는 당연히 하나의 이익과 이해만이 존재한다고 여겼으며, 따라서 사회의 단일성을 전제하며 사회를 단일한 주체로 상상하였다. 또한 그에게 ‘사회’의 관점이란 보통 경제적 이해였으며,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경제 논리였다. 사람은 ‘사회’에 들어가는 순간 개인이 아니라 그 구성원으로서 사고하고 행위 하기를 요구 받았다. 이와 같은 생각은 하나의 작은 사회인 언론사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건전한 언론기관의 필요를 역설하며 신문의 계몽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던 이광수는, 또 한편으로는 언론의 상업적 측면의 확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매일신보>로부터 시작해서 그는 끊임없이 신문 소설을 연재하였다. 소설 한 편이 끝나면 바로 다음 소설을 집필했던 지라, 한 때는 <동아일보> 소설란의 지면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조선일보>에 실렸던 홍명희의 “임꺽정”의 인기에 “단종애사”로 맞불을 놓기도 하는 등, 이광수는 문맹에서 갓 깨어나기 시작했던 민중에게 흥미로운 읽을 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신문의 상업적 측면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지나친 다작 때문에 개별 작품의 질은 초기작들에 비해 떨어지게 되었으며, 동료 김동인을 비롯한 몇몇 문인들로부터 "'무정'에 미치지 못한다"라는 평과 함께 “소설 쓰는 일에 전력투구하지 않았다”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V. 이광수의 언론인으로서의 행적
이광수는 1914년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로 내정되었으나, 여비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해 6월 시베리아 치타에서 이강(李剛)이 발행하였던 시베리아지역 국민회 기관지 <정교보>(正敎報)의 주필이 되었다. 신문연재 소설 <무정>의 성공과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 작성 이후, 최팔용의 권유로 상해로 건너간 그는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귀국 후 32세가 되던 1923년, 이광수는 사장이었던 송진우의 권유로 <동아일보>에 촉탁기자로 입사해 “가실
참고문헌
VIII. 자료 출처
김윤식, 솔, 이광수와 그의 시대, 1999
김현주, 태학사, 이광수와 문화의 기획, 2005
반민족문제연구소, 아세아문화사, 친일, 그 과거와 현재, 1994
서현호, 소화, 한국 근대 지식인의 민족적 자아 형성, 2004
송명희, 국학자료원, 이광수의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1997
이중오, 중앙 M&B, 이광수를 위한 변명, 2000
조맹기, 나남출판, 한국언론인물사상사, 2006
박성철, “춘원 이광수는 어떻게 친일로 변절하였나”, 오마이뉴스, 2005
정범구, “과거청산,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아야”, 노컷뉴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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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pcp.edunet4u.net/~koreannote/1/1-%EC%9D%B4%EA%B4%91%EC%88%9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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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 '뿌리' 모두 불명예, 한겨레, 2005
정운현, 인물과사상사, 왜 조선일보인가, 2000
한국의 명문가문 제 11편 "방응모가",
http://blog.naver.com/vs2100?Redirect=Log&logNo=140032364566, 2006
일본 통치도구로 태어난 민족지 '조선일보', http://blog.naver.com/one2only/8000494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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