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사] 라스카사스-세풀베다 논쟁의 역사적 의의, 제국의 시각으로 본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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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논쟁의 배경

2.1. 유럽의 팽창-‘신대륙’으로의 진출

2.2 인디오 수탈의 시작

2.3 인디오에 대한 인식

3. 라스카사스-세풀베다 논쟁의 진행

3.1 바야돌리드 논쟁

3.2 정리와 라스카사스의 인권/세풀베다의 인종주의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 대한 비판적 분석

3. 라스 카사스의 논의 비판

4. 라스 카사스 - 세풀베다 논쟁의 결말과 역사적인 의의

4.1. 논쟁의 종결 (1550-1551)

4.2. 논쟁 이후의 상황

4.3. 논쟁이 후대에 끼친 영향

4.4. 논쟁의 의의와 그 한계

5.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또한, 세풀베다의 논지들이 갖는 인종주의가 근대적인 인종주의의 기원이라는 후대의 평가에 대해서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인종주의란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자 한 사람의 인종이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사고이며, 인종적 정체성은 피부색과 같은 혈통과 인종의 유산에 의해 개인을 정의하는 것이다. 이영효, 위의 책, p. 150.
그런데 16세기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열등한 종족으로 정의하고 노예화를 정당화한 것은 피부색에 따른 근대 인종차별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에스파냐인들의 차별 의식은 피부색이나 인종보다는 종교와 문화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다. 세풀베다의 논지들이 갖는 인종주의는 근대적인 인종주의와는 관점을 달리하는 것으로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열등함을 본성nature보다는 환경nurture의 영향으로 보았다. 즉, 그의 인종주의는 피부색 등에 따른 신체적 형질에 따른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닌 사회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세풀베다를 위시한 에스파냐의 아메리카원주민들에 대한 타자인식과 차별의식이 이후 인종적인 차별로 나아가는데 일정한 연결점을 제공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는 각각 권력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으로, 라스카사스의 원주민 보호에 관한 주장도 순수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논의로만 보기 어렵다. 세풀베다는 원주민 착취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거를 마련해 주었다. 라스카사스의 인도주의 논의 역시 세풀베다와 방법은 다르지만 그가 주장한 선교와 복음화는 ‘식민‘ 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이었고, 그가 평화적인 개종방법을 주장했지만 그러한 개종은 가톨릭화·유럽화를 목표로 한 것으로서 가톨릭 국가 에스파냐 왕실의 아메리카 식민화에 타당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결과적으로 에스파냐 왕실은 아메리카 정복자들과 식민지 원주민들을 양가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3. 라스 카사스의 논의 비판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의 저서 『인디아스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는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알 5세의 아들, 펠리페 왕자를 위시한 스페인 본국의 지식인과 고관들을 대상으로 하여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되고 있던 스페인인들의 인디오 학살과 착취의 양상을 고발한 보고서이다.
라스 카사스는 이 보고서에서 당시 스페인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인디오 학살과 착취의 구체적인 양상을 각각의 식민지별로 장을 구분하여 다소 감정적이고 과장적인 언어로써 묘사하고 있다. 라스 카사스가 기술한 학살 사건 중 몇가지를 살펴보자. 촐롤라는 멕시코 문명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라스 카사스에 따르면 1517년 이후 행해진 멕시코 정복 와중에 스페인 정복자의 손아귀에 떨어진 도시 중 하나였다. 스페인인들은 촐롤라의 귀족과 세력가들에게 짐꾼 5천~6천명을 요구하였고 짐꾼들이 시내 한 건물의 중정에 모두 모였을 때 스페인 군인들은 “온순한 양”과 같이 순응하던 인디오 짐꾼들을 창과 칼로써 몰살하였다. 시체는 산더미를 이루었고, 이삼일 뒤에는 몇몇 생존자들이 시체더미에서 하나 둘 빠져나오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에 대기하고 있던 스페인 군인들은 그들조차 몰살하였다. 학살은 바다에서도 자행되었다. 이미 라스 카사스의 기록 곳곳에서 인디오 노예 무역이 아메리카 대륙 전역을 걸쳐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에스파뇰라가 노예 무역의 중심지이였다. 바하마에서 에스파뇰라로 향하는 뱃길은 주요 노예 무역 항로 중 하나였는데, 노예선상에서 질병과 배고품으로 죽어간 인디오들은 바다에 수장되었고, 그렇게 죽어간 인디오의 숫자가 엄청났기 때문에 에스파뇰라로 향하는 뱃길은 인디오의 시신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항해도와 나침반이 없이도 물에 떠있는 시체를 따라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플로리다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한 우두머리 학살자는 (...) 원주민들을 (...) 코에서 입술을 거쳐 턱까지 얼
참고문헌
김명섭, 『대서양문명사』, 한길사, 2001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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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파그덴,『민족과 제국』, 을유문화사, 2003
이성형,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까치, 2003
이영효,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에스파냐의 초기 인식과 태도」, 호남사학회(구-전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전남사학) 31집, 2007
장 클로드 카리에르, 『바야돌리드 논쟁』, 이세욱 역, 샘터, 2005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

Hanke, All Mankind is One, Dekalb, Illinois :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7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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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boulay, Columbus and Las Casas, Lanham, Marylan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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