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록에 나타난 중국에 대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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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노가재연행일기>

1. 김창업[金昌業, 1658~1721] 에 대한 소개

2. 노가재연행일기

(1)배경

(2)문체 및 구성

3. 『노가재연행일기』에 나타난 관점

(1) 『노가재연행일기』에 나타난 청나라에 대한 인식

① 청나라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됐을 시기

② 중국 사절활동 진행 시기

(2) 김창업의 시 중에 나타난 화이사상의 변화

① 변화 전

② 변화 후

<담헌연기>

2. 담헌연기[湛軒燕記]

(1) 배경

(2) 문체 및 구성

3.『을병연행록』에 나타나는 관점

(1) 연행과 중국에 대한 포부

(2) 실용적 장치와 문물

(3) 중국 문사와의 교류에 대한 의지

(4) 조선사회의 중국인식 비판


4.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 : 엄성(嚴誠), 반정균(潘庭均), 육비(陸飛)와의 道義之交


본문내용
연행록에 나타난 중국에 대한 관점
<노가재연행일기>
1. 김창업[金昌業, 1658~1721] 에 대한 소개
김창업(1658~1721)의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또는 노가재(老稼齋)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조선후기의 세도가였던 안동김씨의 일원이었다. 증조부 청음(淸陰) 김상헌은 인조 때 유명한 척화 대신이자 명필이었고, 부친 문곡(文谷) 김수항은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냈다. 큰 형 몽와(夢窩) 김창집 역시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형 농암(農巖) 김창협은 여한팔대가(麗韓八代家)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문장가이며, 셋째형 삼연(三淵) 김창흡은 창협과 더불어 대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김창업은 나이가 7세 되던 해인 1664년, 아들이 없는 김상헌의 막내 동생인 김상복의 집안에 양자로 보내졌다. 그는 당시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처럼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을 위해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문장 수업에 열중하지만, 학자적 기질보다는 예술적 자질이 컸다. 이는 당시 번영을 누리던 사대부 집안의 자제로서의 예술적 자질을 의미한다. 그는 24세 때인 숙종 7년에 진사가 되지만, 이후 관료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등용문인 대과시험을 과감히 포기한다. 이는 명문가의 후예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김창업은 당대에 이름 있는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데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와 ‘송시열77세상(宋時烈77歲像)’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그가 벼슬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단지 예술적 재능 때만은 아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그로 하여금 벼슬길을 포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7세기 후반부터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김창업이 진사에 합격할 당시에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의해 남인이 정치적으로 실각하였고,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시기였지만, 그는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가문의 후광이 있었겠지만, 이후에 찾아오는 정치적 시련은 그의 환로에 대한 생각을 접게 하였다. 그는 32세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는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된다.
1680년 남인들은 허적의 권력남용 문제로 경신대출척을 당한 후, 중앙 정계에서 영원히 소외되는 듯 보였으나, 1689년 숙종 때 중앙 정계 진출의 기회가 왔다.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아들을 얻게 되자, 그의 품계를 높이려 하였다. 하지만 송시열 등은 그 시기가 빠르다고 여겨 이를 반대하고, 이 일을 빌미로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서인이 축출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고, 다시 남인들에게 권력이 이양되었다. 이때, 아버지 김수항이 삭탈관직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윤3월에 사사되었다. 이후 김창업은 전원에 회향할 것을 생각하며, 과거를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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