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일본 무사정권의 성립 -가마쿠라 바쿠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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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무사 계급의 형성

무사들의 정권 장악

겐페이 전쟁 - 막부체제로 가는 마지막 단계

무사정권 수립의 촉매제

서양 무인집단과의 비교

<<참고문헌>>
본문내용
무사들의 정권 장악
무인들이 정권의 핵심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썩을 대로 썩어 들어간 귀족 기득권층의 내분과 황실 안의 권력투쟁에 있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후지와라 가문은 셋칸(섭정과 관백)의 자리에 앉아 딸들을 천황家에 시집보내 황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들었다. 1068년 제위에 오른 고산조 천황은 180년만에 처음으로 후지와라의 피가 섞이지 않은 천황이었다. 그는 이 기회에 득세하는 외척의 뿌리를 뽑고자 후지와라 가문에 대한 인사숙청을 감행했다. 일본역사에서 매우 드물게, 천황의 권위가 제대로 서는 듯 했다. 그러나 뒤이은 시라카와 천황은 상황의 자리로 물러나 院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실권을 휘둘렀다. 이른바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천황은 얼굴마담 노릇을 하고 상황이 국정을 좌지우지 하는 ‘원정’은 약 100년 가까이 이어졌다. 1156년, 이런 비정상적인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고시라카와 천황은 급기야 상황 스토쿠와 일전을 치를 태세를 갖춘다. 이때 후지와라를 비롯한 일본 내의 모든 정치세력은 천황파와 상황파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는데, 양쪽 다 칼을 가진 무사 계급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 온 것이다. 천황파와 상황파는 둘 다 가장 큰 무인 세력인 미나모토와 다이라 가문에 원군을 요청하고, 두 가문도 천황지지와 상황지지로 갈라서버렸다. 고시라카와 천황을 지지하는 천황파의 무사들이 상황파를 야간에 급습하여 제거해버리는데, 이 사건이 바로 ‘호겐의 난’이다. 여기서 천황이 상황을 이겼다는 사실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호겐의 난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권력투쟁의 중앙무대에 무사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정권의 향방조차 무사들이 좌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독자적인 역사관을 전개하여 일본 역사철학의 원류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지엔(慈円,1155~1225 가마쿠라시대 천태종의 승려)은 1220년에 완성한 자신의 대표작인 방대한 역사해석서 <우관초 愚管抄>에서 호겐의 난에 대해 “일본국에 난역이 일어난 후 무사의 세상이 되었다”고 저술했다. 아미노 요시히코, <일본사회의 역사> p.97

하지만 아직 남겨진 숙제가 있었으니, 미나모토와 다이라 간에 일본의 실권자 자리를 둔 대결이 남아있었다. 두 개의 무인 가문이 정녕 평화롭게 공존할 수는 없었던 듯, 이들은 호겐의 난 때 힘을 합친 후 2년 만에 갈라져 서로에게 칼끝을 겨눴다. 스토쿠 상황을 몰아낸 고시라카와 천황은 어이없게도 자신이 상황의 자리에 오른다. 다시 한 번 천황과 상황 사이의 알력이 생기자 핑계거리만 찾고 있던 미나모토와 다이라는 일본열도의 패권을 놓고 맞붙었다. ‘헤이지의 난’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전투 끝에 명장 다이라노 기요모
참고문헌
John W. Hall, 박영재 역, <일본사> (역민사, 2000)

구태훈, <일본역사탐구> (태학사, 2002)

아미노 요시히코, 남기학 역, <일본 사회의 역사> (소화, 2001)

야마모토 히로후미, 이재석 역, <교양인을 위한 일본사> (청어람미디어, 2002)

이경덕, <역사와 문화로 보는 일본 기행> (예담, 2001)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97)

Frederic Delouche,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 (까치글방,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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