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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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사찰계의 기원
3.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의 성립
4. 신앙활동으로서의 사찰계
5. 보사활동으로서의 사찰계
6. 사찰계의 운영과 시기별 양상
7. 사찰계의 활동의 實際 - 조선 후기의 범어사와 사찰계
8. 맺음말
본문내용
3.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의 성립 배경
조선시대의 배불은 건국 직후부터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개창자 태조는 護佛의 입장에서 고려불교를 계승하는 조처를 취하였으나, 태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인 배불이 전개되었다. 이후 16세기 중반 중종 대까지 계속된 배불의 결과 성내의 승려는 격감하고 각지의 사찰에는 승려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攝政하면서 普雨(?~1565)와 함께 승과를 부활하고 선교 양종체제를 재확립하는 등 불교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선시대 불교사에서 문정왕후와 보우에 의한 불교의 중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데, 이 때 부활한 승과를 통해 西山大師 休靜과 四溟大師 惟政이 배출되면서 조선후기 불교의 위상을 격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법맥이 광범위하게 계승되어 조선후기 불교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후 왜란과 호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낸 의승군의 활약은 불교의 위상을 재고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전공을 세운 의승장이 고위관직에 임명되는 등 불교계는 국난의 위기에서 오히려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찾게 되었다. 유교정치 체제하에서 천대받던 불교가 국난 극복에 큰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불교계는 정치 ․ 사회적 기반을 다시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승군의 활동이 가져온 부정적인 측면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출가집단이라는 특성은 일반사회보다 강한 조직적 결속력을 갖게 마련이고, 이러한 측면이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하는 의승군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양난 이후에도 국가에서는 승도를 公役에 징발하는 등 국가의 使役集團으로 변질시켰던 사실은 의승군이 초래한 逆機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승도는 각지의 산성 축조와 방비에 동원되어 다시 한번 침체의 길에 빠졌다. 당시 불교계에 대한 인식은 양질의 노동력을 소유한 사역집단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후기 사원의 경제적 상황 역시 배불의 정치적 측면과 맞물려 매우 어려운 입장이었다. 건국 초 신왕조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사원소유의 田地와 寺奴는 압수 ․ 屬公되었고, 점차 불교계는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승려의 신분은 賤民에 가까운 良人취급을 받거나 그 자체 천민이라 할 정도로 격하되었다.
더불어 사찰은 지방관리나 유력자들에 의한 사사로운 징발과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사찰은 각종의 진귀한 山菜와 山果, 수공품의 조달이 가능하였고, 이는 양반관료들의 집중적인 貪虐의 대상이 되었다. "尊官이 半日閑을 즐기기 위해 사찰에 찾아오면 老僧들은 삼일 동안 쉬기를 잊고 하루는 휘장을 치고, 하루는 잔치에 참여하며 나머지 하루는 掃除를 해야만 하였다, 尊官得半日閑 老僧却忘了三日 一日供帳 一日燕集 一日掃提也", 『牧民心書』 권2, 律已.
이러한 재물공여는 간혹 사찰의 자발적인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승려의 신분을 천인시하는 현실에서 사찰을 지탱하고 그나마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인이나 지방세력가들에게 재물을 제공한 것이였다. 더 나아가 사찰 중에는 중앙관부를 비롯한 宮房, 지방의 監營과 兵營 등에 소속되는 屬寺가 생겨났다. 그러나 속사는 일시적인 보호장치였을 뿐 사찰의 부담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후기의 불교계는 사회 ․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곤궁을 탈피하기 위해 당시의 승려들은 환속하거나, 사찰을 비우고 관아와 지방관리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산중 깊숙이 은둔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승려가 떠나간 사찰은 폐사되기 일쑤였고, 조선시대의 사찰 중 15.5%만이 1910년대 초까지 유지되었다는 분석은 배불의 심각성을 여실히 반영한다. 같은책, p. 48, 재인용.

이처럼 조선후기 국가와 양반관료의 수탈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승려의 사유재산이 발생하였다. 원래 불교에서는 승려가 私的으로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초기 이후 지속된 배불과 양난 이후 가중된 사찰경제의 몰락은 더 이상 사원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가람을 유지하기 위한 자산을 생간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7세기 무렵에는 승려의 사유재산이 형성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수입인 祈禱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미투리나 종이 등의 생산에 참여하거나, 때로는 田地와 堤堰을 개간하면서 재산을 형성해 나갔다. 즉 조선후기 불교의 경제활동은 궁핍한 사찰재정을 유지하기 위한 긴박한 필요에서 전개된 것이다. 점차 사찰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전문적으로 殖利行爲를 추구하는 승려가 등장하였고, 英祖 연간에 이르면 '富僧'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財貨를 소유한 승려도 존재하였던 것이다. 같은책, p, 49. 재인용.

이러한 경제적 배경과 그 당시 사회 각층에 정착되어 있던 一般契의 영향으로 인해 사찰계는 성립되었다. 사찰계는 기본적으로 다수의 僧俗이 참여하여 이루어지므로 승도가 적은 사찰이라 하더라도 신도가 함께 참여하여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8 ․ 19세기 전국의 거의 모든 사찰에서 각종의 계가 번성하면서 조선후기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시켜 나갔던 것이다. 더불어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이 바로 신앙적 배경도 작용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신앙적 목적을 위한 구체적인 형태로 사찰게가 발전하였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사찰계는 조선시대의 배불이 가져온 경제적 궁핍을 극복하고 아울러 집단적 결속을 통해 수행과 신앙을 고취하기 위한 이중의 목적을 지니고 성립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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