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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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후쿠자와 유기치, 그는 누구인가?

(1) 하급 무사의 아들

(2) 나가사키 유학

(3) 오가타쥬구(緖方塾) 그리고 네덜란드어에서 영어로

(4) 미국여행과 유럽견학 시절

(5) 메이지 유신 이후의 후쿠자와

II. 유기치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

(1) 유럽 내부의 상황과 대외적 팽창

(2) 일본 국내적 상황

(3) 러시아의 팽창과 일본의 위기의식

1)청일전쟁의 강화조건과 러시아

2)러시아의 새로운 동북아 정책노선

3)일본의 강경론 대두

(4) 당시 조선의 상황

III. 후쿠자와 유기치의 사상

(1) 민권론자로서의 유기치

(2) 국권론자로서의 유기치

(3) 유기치의 문명론

(4) 정한론

(5) 탈아론

IV. 일본 제국주의의 대변자로서의 유기치

(1) 민권론자에서 국권론자로의 사상적 전환

(2) 정한론과 탈아론의 제국주의적 요소

(3) 일본 국내 정치, 경제적 상황에 근거한 대외적 팽창

(4) 나카에 조민(中江兆民)과의 비교

V. 동아시아 근대화의 주도자로서의 유기치

(1) 서구 문물의 수용 주장 및 교육적 노력

(2) 의도와 결과의 문제에 대한 분리된 인식의 필요

VI. 결론

참고문헌

* 첨부 : 후쿠자와 유기치의 생애

본문내용


III. 후쿠자와 유기치의 사상

(1) 민권론자로서의 유기치

후쿠자와 유기치가 쓴 『학문의 권유』는 ꡒ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ꡓ 는 말로 첫 장을 시작한다. 이는 물론 미국의 독립선언문에서 인용한 구절이지만 발상이 신선하여 당시 무언가 변화를 추구하던 일본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다. 서양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설명한 『서양사정』과는 달리 『학문의 권유』는 후쿠자와가 자신의 사상을 대담하게 토로하고 있는 저술이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추적해 나가는 데에 있어 빠트려서는 안 될 사료가 된다. 이 저술의 초편부터 3편까지는 ꡐ한 개인의 독립ꡑ과 ꡐ한 나라의 독립ꡑ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개인의 독립은 학문을 통하여 기력을 회복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인간평등과 존중, 개인의 창조와 책임을 역설하고 관존민비의 폐풍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후쿠자와는 민권 신장을 위해서 무엇보다 국회 개원이 선결과제라는 생각에 1879년 출간한 『민정일신(1879)』에서 ꡒ국내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권력자가 장기간 권좌를 누리지 않고 적시에 교대하는 데 있다ꡓ고 지적, ꡒ국회의 투표에 따라 국정 최고 책임자를 바꾸는 영국의 정당정치를 크게 본받아야 할 것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민정일신』이나 『통속국권론』 등을 집필하던 1870년대 말은 그에게 있어 말 그대로 고난의 시대였는데, 자신이 평생 전력을 쏟아 붓고 자랑으로 여겨왔던 게이오 의숙이 사학으로서 정부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불이익을 받아 운영에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부터 그는 관에 접근하기 시작하여 정부를 지지하는 주장도 자연히 빈번하게 하게 되었다. 후쿠자와는 나중에 『병론』에서 ꡒ정부의 지원이 확실하지 않고 성격도 애매한 관권 신문의 펜은 세상 사람도 믿지 않는다. 나는 특히 관권론자의 찬성을 사절한다. 이 세상에서 자가독립의 믿음을 잃기가 두렵기 때문이다.ꡓ고 당시 권력에 접근하려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리고서는 자유민권운동에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된다.

(2) 국권론자로서의 유기치

그러나 『문명론지개략』이후의 글들에서는 오히려 민권론에 대한 그의 고민들이 없어지고 강병론자, 국권 확장론자로서의 글만 남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79년 작 『민정일신』에서는 상당히 당시 정권세력에 만족하면서 부국강병론의 brain으로서 명치주역들과도 친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후쿠자와는 민권과 국권을 두 편으로 명확히 분리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나 국권이 민권에 앞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시종일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통속국권론(1878)』 2편에서 논하고 있는 국권과 민권의 관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ꡒ밖의 중대한 일을 수행함에 잘못이 없다면 안의 민권은 저절로 해결되는 일로 간주해야 한다ꡓ는 것이다. 즉, 유기치는 민권은 국권을 잘 수행하면 저절로 실현되는 종속적인 관계로 파악하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1882년 <지지신보>를 창간한 그는 이때부터 국권확립을 위해 온 힘을 쏟게 되는데, 창간사에서 ꡒ필생의 목적은 오로지 국권의 한 가지에 있다ꡓ고 말한다. 그의 사상의 축이 민권론에서 국권론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도 자연스럽게 민권론이 국권론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국권론은 왜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를 확보하는 형태로서 팽창해야만 일본이라는 국가가 공고화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유기치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는 문명론에 대해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토마스 버클(Thomas Buckle)과 프랑소와 기조(Francois Guizot)의 영향을 받은 유기치는 『문명론지개략』에서 인류문명을 ꡐ야만ꡑ ꡐ반개ꡑ ꡐ문명ꡑ의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것으로 파악, 아직 문명에 이르지 못한 나라는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시 최고에 달한 유럽 문명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일본을 제외한 동양문명을 아직 야만이나 반개의 단계로 바라보았는데, 이러한 입장은 특히 아래에서 잘 드러난다.


참고문헌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서울:한길사, 1997.
임종원,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 - 문명사상』, 서울:신일본문학연구총서, 2001.
정일성,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론을 어떻게 펼쳤는가』, 서울:지식산업사, 2001.
久野收 鶴見俊輔 지음, 심원섭 옮김, 『일본 근대 사상사』,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94.
Fukuzawa Yukichi,『The Autobiography of Fukuzawa Yukichi』,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6.
전파연구모임, ꡒ후쿠자와 유기치 <문명론의 개략>ꡓ (http://plaza.snu.ac.kr/~ysha/index2.htm)
이또 나리히코(伊藤成彦), ꡒ새로운 천년의 보편적 윤리ꡓ
(http://altair.chonnam.ac.kr/~cnu518/conf/simpo019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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