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인들의 가체사용, 그 폐단과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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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1) 문헌 속 조선여성들의
다양한 머리모양과 가체(加髢)
(2). 가체의 제작과 유통
(3). 가체를 썼던 사람들
(4). 가체 사용의 폐단
(5). 가체 금지령
(6). 가체금지령 그 후
3. 결론
본문내용

2. 가체의 제작과 유통

가체는 어떻게 제작되며 유통되었을까? 우선 그 제작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가체의 재료는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공자님 말씀이 법처럼 떠받들어졌던 나라 조선에서 감히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가체가 유행하면서 가체의 수요도 컸을 것인데, 가체 제작의 주재료인 머리카락은 어떻게 얻었을까? 다음 이야기를 보자.

선비 이 아무개 집은 남산 아래에 있었다. 그는 가난을 편안히 여기며 책읽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그 아내에게 말하길
“내가 10년 동안 역(易)을 읽으려고 하는데 당신이 나에게 소려(蔬糲) 소려(蔬糲) : 채소와 궂은 쌀. 또는 궂은 쌀로 지은 밥.
를 해 대줄 수 있겠소?”
부인은 할 수 있노라고 허락하였다. 이생은 마침내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매우 견고하게 방을 봉쇄하고, 겨우 밥그릇 하나만 들일 수 있는 혈창(穴窓)으로 조석의 밥을 들여보내도록 했다. 그는 밤낮없이 쉬지 않고 7년 동안 책을 읽었는데, 창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머리에 서 광채를 발하는 어떤 한 중이 창밖에 넘어져 있었다. 이생이 놀라 밖에 나가 보니 그것은 곧 그의 아내였다. 이생이 말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오?” / 아내가 말했다.
“제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지 이미 닷세가 되었습니다. 7년 동안 당신을 먹여 살리느라고 한 터럭의 머리칼도 남지 않게 되어 이제는 힘이 쇠뇌 끝에 이르렀으니 힘이 쇠뇌 끝에 이르다 : 활을 발사하기 직전까지 시위를 잡아당기고 있는 모양으로 몹시 힘에
부치어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음을 뜻함.
어찌하겠습니까?
........ 『청구야담』. 권 4. 安貧窮十年讀易 (독역(讀易)과 치산(治産))


위의 이야기를 통해 가체를 만들기 위한 머리카락을 어떻게 얻었는가에 대해서 추론해 낼 수 있다. 아내는 공부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머리카락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던 것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봤을 때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고, 가난한 서민들이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선택하는 최후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가체의 가격도 매우 비쌌을 것이다.

“지금의 다리 다리 = 다래 = 월자(月子) = 월내(月乃 ) = 체계(髢髻) = 가체(加髢) = 체자(髢子)
는 곧 주례(周禮) 주례(周禮) : 중국 경서의 하나. 주나라의 관제를 분류하여 설명한 내용으로, 중국의 국가제도를 적은 최고(最古)의 책이다.
부편차(副編次) 부편차(副編次) : 다른 사람의 머리칼로 만든 소위 머리꼭지를 본머리에다 입히는 것
(성호사설에서의 해석)
의 유제(遺制) 유제(遺制) :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제도. 남아있는 옛 제도
이니, 예가 아니라고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머리털을 취하는 것은 의례(儀禮) 의례(儀禮) : 중국 3대 예절 지리서(禮記, 儀禮, 周禮) 중 하나.
의 정주(鄭註) 정주(鄭註) : 중국 후한의 정 현이 한 고전의 주석.
에 ‘형인(刑人)이나 천한 자의 머리털을 취하여 만든다.’고 일렀습니다. 대개 옛사람이 신체 발부(身體髮膚)는 감히 훼상(毁傷)하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모름지기 형인의 머리털을 취하여 왕후로부터 그 이하 모두
참고문헌
- 이익 『성호사설(星湖僿說)』민족문화추친회
- 빙허각 이씨 『규합총서(閨閤叢書)』보진재 출판사
- 편찬자 미상 『청구야담(靑丘野談)』한국문화사
-『조선왕조실록』Korea A2Z(http://www.koreaa2z.com/)
- 이능화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민속원
- W.E.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집문당
- A.H.새비지 랜도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집문당
- 손미경 『한국의 髮자취』도서출판 이환
- 한국문화 콘텐츠 <풍속화>
한국의 지식콘텐츠(http://www.krp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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