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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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들어가면서
1. 광해군의 대외정책
2. 인조반정의 배경
3. 서인이 내세운 인조반정의 명목
4. 인조반정의 경과
5. 인조반정 후의 조선
6. 광해군 재평가
7. 현대판 인조반정
§ 인조반정에 대한 우리조의 생각
본문내용
§ 들어가면서
국왕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반정은 조선시대에 종종 일어났다. 그 중에 성공한 것은 중종반정과 인조반정뿐이다. 그 중에 가장 많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인조반정에 대해 알아보자.

1. 광해군의 대외정책
광해군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후금은 강성해지고 있다는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명나라가 후금과 전쟁을 일으키며 조선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였을 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ꡒ절대 후금과 싸우지 말며 적당한 시기에 조선의 출정은 명나라 청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한 것이라고 누르하치에게 알려라ꡓ는 명령을 내렸다.
광해군은 국내 정세의 불안을 감안하고, 또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갖고 있는 허구성을 정확히 파악, 후금이 남하하여 이 땅이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비극을 막기 위해 강홍립에게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겉으로는 명나라에 복종하면서 한편으로는 후금의 침략 가능성을 무마시켜 국가의 안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대외 정책은 현대 국제정치에서도 보기 힘든 절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인조반정의 배경
선조조에 시작된 동서 분당은 점차 치열한 당쟁으로 발전되었다.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 소북으로 분파되었다. 선조 39년(1606)부터 대북은 광해군을, 소북은 영창대군을 왕위계승자로 지지하는 심각한 쟁투를 벌이는 끝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일찍부터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여 조신들을 계칙하고 스스로 당론에서 초월하려고 하였으나 그에게는 그의 즉위를 옹호한 대북의 음모와 간청을 억제시킬 만한 역량이 모자랐다. 그리하여 대북파의 간청에 따라 광해군 원년(1609) 4월에 임해군을 살해했고, 광해군 5년(1613)에는 칠서지옥의 무옥을 일으켜 김제남을 사사하고 이모제인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 시켰다가 이듬해 2월에 증살시켰다. 광해군 7년(1615) 11월에는 왕기가 있다는 능창군 전(佺)을 교동에 안치한 후 살해했으며 대북정권에 호위된 광해군은 이어 대비폐출계획에까지 말려들어 광해군 10년(1618) 정월에 대비의 존호를 깎아 서궁이라 칭하게 한 대비유폐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3. 서인이 내세운 인조반정의 명목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이 광해군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php?where=100&id=129643
한국브리태니커온라인 http://premium.britannica.co.kr/bol/topic?article_id=b18a1272a
(주)이소프트 서울육백년사 교육 CD 인조반정과 서울
인조조의 반정공신세력에 관한 연구의 분석〈역사비평〉13. 오수창. 역사비평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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