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협상] 외규장각은 왜 반환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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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1.1 들어가며

1.2 용어정리

1.2.1 규장각

1.2.2 병인양요

1.2.3 의궤

2. 본론

2.1 피탈된 의궤와 반환의 정당성

2.2 의궤 반환을 위한 노력

2.2.1 협상의 시작

2.2.2 협상의 현재

3.결론

3.1 협상 실패 이유

3.2 협상 아이디어

4. 맺음말

본문내용
1.2.1 규장각

세조 때에 양성지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할 규장각을 두기를 청하였으나, 실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숙종 때에는 작은 전각을 마련하여 ‘규장각’이라 이름 하였으나, 직제는 갖추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한 뒤 1776년(정조 1년) 음력 9월 25일에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직제학·직각(直閣)·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 등의 관리를 두었다.‘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외규장각 의궤 조사연구> 외교통상부 2003
이때 규장각은 그 이름대로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역할을 하였다.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文翰)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의 문운을 불러일으킨 중심기관으로서 많은 책을 편찬했으며, 여기에는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들도 채용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환관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케 하여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疾苦) 등을 살피게 하는 데 있었다. 또한 문교를 진흥시키고 타락된 당시의 풍습을 순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다.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많은 책을 출판하도록 하였다. '작인지화'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규장각에서 정조가 유생들을 모아 그 중에서 젊은 문신(文臣)을 뽑고, 뽑힌 신하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 해서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참고자료

♢ 외규장각 의궤 조사연구, 한국 외교통상부, 2003

♢ 외규장각 도서 무엇이 문제인가?,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9

♢ 한국 문화재청 www.cha.go.kr/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www.unesco.or.kr/

♢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http://www.mofat.go.kr/economic/negotiationheadquarters/introduction/


♢ 약탈문화재반환 이대로 좋은가, 황평우, 2002

♢ 국가기록유산 www.memorykorea.go.kr

♢ 다큐멘터리 영화 2005 감독 하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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