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 고산윤선도연구- 그의 자연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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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리 시 문학사에 있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만큼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이나 의미부여가 남달랐던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文永午, 「尹善道論」, 『韓國時調作家論』, 國學資料院, 1999, p.369
그는 조선조의 문신이자, 정치가였고, 예학자였으며, 훌륭한 의사였고 또한 음악에 대한 조예도 남달랐다. 그러나 우리는 윤선도의 이러한 다양한 방면의 활약상을 알고 있기보다는 그가 뛰어난 “자연시인”이었다는 점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를 이러한 면에 치우쳐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성낙은 편저, 『고시조 산책』, 國學資料院, 1996, p.371.
고산(孤山)은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 때에 진사시에 급제한 성균관 유생으로서 당시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이른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임금을 올바로 모시지 못한 간신에 대한 통렬한 비난을 하여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조선 17대 왕인 효종의 스승으로서 그의 큰 존경과 신임을 얻기도 하였고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에 대한 조예가 남달라 평생토록 이것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당시 혼탁한 사회질서와 어두운 현실을 밝혀 줄 수 있는 등불로 인식하며 <소학(小學)>이 자신의 인간됨됨이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기며 살았다. 즉, 유학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고 성숙시켜 나간 예학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42세때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공조좌랑, 한성부 서윤등을 역임하였으며, 47세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시강원 문학등에 임명되기도 하였고 효종의 부름으로 예조참의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동부승지에 임명되기도 하는 등 정치가로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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