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문화와 예술 - 한니발과 스키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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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립(포에니 전쟁)의 원인
2.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립의 시작
3. 한니발의 등장
4. 한니발의 전성기(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5. 한니발의 패배
6.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최후
- 못 다한 에피소드 -
7. 3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9-146년)
8. 포에니 전쟁의 의의
9. 한니발vs스키피오에 대한 정리 및 느낀 점
10. 참고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1.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립(포에니 전쟁)의 원인
지중해를 둘러싼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후 로마는 기원전 3세기 이후 당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지중해를 정복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건너편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페니키아인들의 계승자였던 해상제국 카르타고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카르타고는 이미 서부 지중해에 해상무역거점을 두고 북아프리카 연안의 항구를 중심으로 해상제국으로 성장해있던 나라였다. 로마는 이러한 카르타고와의 충돌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해군력의 강화가 필수였고 결국 로마는 해상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함의 건조와 전략전술의 개발을 바탕으로 카르타고와 3차에 걸쳐 약 120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하게 된다. 당시 로마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을‘포에니인’이라고 불렀고 이 전쟁을 페니키아인들과의 전쟁이란 의미로 포에니전쟁 이라고 한다.
이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로마의 스키피오의 장군의 대립을 볼 수 있는데 한니발은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카리스마로 부하를 통솔했고 스키피오는 좋은 인간성으로 부하를 통솔했다고 한다. 현대에 이 둘의 전술은 알렉산더대왕과 더불어 5대 명장에 속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번 과제는 중심인물을 바탕으로 서술하는 게 주제이자, 목적이므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립을 중심으로 서술하겠다.

2.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립의 시작

초기 로마가 생길 때는 지중해를 둘러싼 쟁쟁한 경쟁자가 카르타고와 그리스가 있었다. 그리고 로마가 점차 성장해서 힘을 겨룰 때가 됐을 때는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카르타고는 해운업으로 한창 번영하고 있었다. 로마는 지중해를 자신의 수중에 넣지 않고서는 넓은 땅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처럼 지중해를 지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로마와 카르타고 중간에 지중해의 섬인 시칠리아 섬이 있었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와 메시나, 시라쿠사가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는데 시라쿠사의 공격을 받은 메시나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해옴으로써 제1차 포에니전쟁(BC 264~241)의 발단이 된다. 로마는 한동안 고심했지만 도와주지 않으면 메시나는 카르타고에게 의지하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이탈리아 코앞의 시칠리아 전체가 지중해의 최강국 카르타고에게 넘어감을 의미했다. 이미 시칠리아의 절반은 카르타고의 차지인 상태였다. 결국 원로원은 파병을 선택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그리스의 식민지 도시 시라쿠사는 오랜 적대관계인 페니키아족의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강력한 로마군은 당장에 시라쿠사를 공격하여 동맹국으로 만들어버렸고, 곧 카르타고와의 첫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후 로마와 해전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로마는 3단 겔리선 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카르타고는 5단겔리선 120척을 가진 최강의 함대를 가진 나라였다.
카르타고는 원래 해운업으로 번성한 나라여서 상인의 배를 지켜주기 위한 해군이 매우 강했으나 육지에서 싸울 일이 잘 없었던 터라 육군은 약했다. 이에 반해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합시키기 위해 강한 육군이 필요했으나 해군의 발달은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결과는 당연히 육지에서 싸웠던 모든 전투는 로마가 대승하였고, 바다위에서 싸운 모든 전투는 카르타고가 대승하였다.
위 결과가 나오자 각 국은 머리를 짜내어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게 된다. 로마는 약한 해군을 보완하기 위해 배를 만들고 (일명 까마귀(Corvus)라고 하는 함선 간 도하장비) 해군양성에 대폭 투자하게 되고 카르타고는 그리스나 스파르타에서 유명한 장군들을 돈으로 스카우트하여 모자란 육군을 보완하였다.

󰀺까마귀(Corvus)라고 하는 함선 간 도하장비

그러나 오랜 시간 훈련된 육군과 해군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턱이 없었다. 약점은 약점이었다.
이렇게 되자 로마의 레굴루스 장군은 카르타고 본토 침략을 강행하게 된다. 로마의 강한 육군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카르타고 본진을 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로마에서 몰래 출발한 로마육군을 태운 배는 순조롭게 카르타고로 건너가서 카르타고 본진을 위협하였다.
이에 카르타고는 로마를 포위하고 있던 해군을 모두 본진으로 철수 시키고 로마와 싸웠으나 다 지게 되고 카르타고는 큰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카르타고가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카르타고는 구세주와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스파르타에서 돈을 주고 끌어온 장군인 크산티포스 장군이었다. 크산티포스 장군의 전술과 전략은 매우 뛰어나서 그 강한 로마 군대를 단숨에 격파해 버리고 로마의 장군인 레굴루스 장군을 붙잡아 죽여 버린다. 간신히 살아남은 로마군대는 허겁지겁 철수해 버리고 서둘러 로마로 떠났으나 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거의 다 전멸하게 되고 로마에 도착한 로마군은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이로써 로마는 거의 10만 명에 가까운 군대를 잃어버리게 되고 이것은 초기 로마에게는 너무도 뼈아픈 손실이었다. 하지만 이에 로마는 굴복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다시 군대를 모집하고 키워서 카르타고로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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