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치론 -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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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김일성의 생애
- 인물의 간단한 소개
- 유소년 시절
2. 항일무장투쟁
3. 북한정권의 성립
4. 6·25 전쟁
- 의의
- 결과와 성격
5. 독자노선의 표방과 주체사상
6.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김일성의 사망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김일성만큼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많이 다르다. 조선로동당은 김일성을 '인류의 태양', '절세의 위인', '혁명의 위대한 전략가',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창조와 건설의 영재' 등으로 선전하여왔다. 반면 남한정부는 오랫동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사실을 부인하면서 북한주민들이 김일성을 싫어하면서도 공포감 때문에 복종하는 척하고 있다. 라고 과거에 많이 보고 되어왔다. 과거에 비해 남과 북의 관계는 많이 좋아진 편이다. 한민족이지만 문화적 차이가 너무 큰 남과 북, 금강산 관광 뿐 만 아니라 남과 북의 동물들까지 교환하는 등 여러 교류가 이루어지며 관계도 많이 나아진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통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한 때에 통일의 장단점에 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도 가져야 할 것 이다. 그런 점에서 북의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연구는 우리의 오랫동안 최대의 쟁점 이였다. 이러한 극단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생애 에서부터 사망까지 김일성 이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김일성의 생애
- 인물의 간단한 소개
1912년 4월 12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에서 태어났으며, 김일성의 본래 이름은 김성주이다. 아버지는 김형직, 어머니는 강반석이고, 김철주, 김영주는 친동생이다. 그는 어릴 적에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동해 살았다.
그 후 청년이 되자 고려 공산청년회 등 공산당 단체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함경남도 혜산진의 보천보를 점령했었던 이른 바 보천보 전투이다. 이 보천보 전투로 인해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점차 일본군의 반격이 심해지자 소련으로 가서 소련군에 입대, 1945년 소련군 소좌가 되었다. 45년 마침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김일성은 여기서 만난 동료 김책, 최용건, 김일등과 함께 소련 연해주 항구에서 소련배 푸가초프호를 타고 조국으로 귀환하여 소련군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게 된다. 평양으로 들어와서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민대회에서 평양시민들에게 첫 모습을 보였다. 그가 처음 평양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정말 김일성 이면 우리가 아는 김일성은 80대 노인인줄 알았는데 새파란 애송이 였구만” 이라고 하면서 수근 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청산유수적인 연설을 내뱉고 소비에트식 정권을 유지시켜서 북한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 1948년 7월 인공기를 제정하고, 남북분단이 현실화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고 그 수상이 되어 명실상부한 권력의 핵심자로 발판을 굳혔다. 1949년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조소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는 스탈린을 만나 남침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고 마침내 스탈린은 김일성의 말에 동의했다. 이렇게 되자 마침내 그는 6.25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휴전 협정 후 미군의 엄청난 폭격으로 파괴된 북한의 생산시설을 복구 하는 데에 전력을 집중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천리마 운동이다. 전쟁 후 그는 그에 대해 적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될 것 같은 연안파등 세력을 축출했다. 1953년 박헌영을 사형에 처하고 그에 반대되는 인물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들여 고문하고 사형하였다. 그 후 그는 그의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고 1994년 7월 8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청년시절 독립군을 이끌고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등 한국 근대사에 씻을 수 없는 훌륭한 업적을 나겼지만 반대로 동족 간의 전쟁을 일으켜 큰 과오를 남겼다.

- 유소년 시절
해방 이후 북한에서 50년 가까이 절대독재자로 군림하였던 김일성의 인성과 이념적 성향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유소년 시절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져 유소년 시절에 대해 소개를 하겠다. 위에서도 말하였지만 김일성의 출생시 이름은 김성주 이다.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대에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으로 올라갔으며, 김일성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응우 대부터 만경대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소작살이를 하였으며, 그의 할머니는 집에 시계가 없는 것을 늘 한탄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웠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집에 시계가 없어 할머니는 매번 쪽잠을 자다가 첫새벽에 일어나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가늠하고는 서둘러 조반을 짓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비교적 인텔리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평양의 유명한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에 다녔으며, 뒤에 기독교계통인 명신학교의 교사생활을 한 바 있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이 교회장로였고, 김일성의 어머니가 어린 그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어머니가계도 인텔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아버지 직업과 어머니의 생활에 비추어 김일성이 어린 시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라는 추측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종교적 영향은 받지 않았지만, 기독교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 도움은 많이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유소년기에는 민족문제가, 청년기부터는 계급과 민족 문제가 중요한 관심사였으며, 그의 삶에서 계급을 초월한 인간과 신이 주요 관심사였던 적은 없었다. 김일성이 어린 시절 교회에 나간 적은 있으나, 그는 “동심에 맞지 않는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낀 다음부터는 잘 다니지 않았으며, 특히 아버지가 “너는 예수보다도 자기 나라를 더 믿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더 믿어야 한다” 라고 말한 이후부터 잘 다니지 않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일성이 어린 시절 민족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어린 김일성에게 애국을 계속 강조하였으며, 커서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성주’ 라고 지어주었다. 김형직은 1917년 서당교사로 있으면서 평양의 민족주의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 때문에 1918년 검거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김일성은 7세 때인 1919년 만주로 이주하였다가, 1923년 평양에 돌아와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는 창덕학교를 다녔으며, 13세 때인 1925년에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김일성이 1926년 천도교도인 민족주의자 최동오가 숙장으로 있던 남만주의 화전현 소재 정의부 소속 화성의숙에 입학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듬해인 1927년, 김일성은 길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진보적인 교사들로부터 공산주의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그 덕분에 1929년 일제첩보자료에도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된다. 김일성은 1929년 가을에 반일활동혐의로 중국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에서 퇴학당했으며, 1930년 봄에 출옥하자 이종락이 이끄는 국민부 계통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즈음 그는 당시 대부분의 반일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변명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어린 시절 조선과 중국에서 학교를 다님으로써 조선어와 중국어 모두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14세 때인 1926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20세 때인 1932년에 어머니를 여의게 된 사실은 그에게 큰 불행이었지만, 그 결과 그는 항일투쟁기간 중 일제의 회유공작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과 환경을 가지고 김일성은 이후 만주지역에서 조선인 및 중국인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의 한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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