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의 삼대, 만세전 역사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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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작가소개
II. 시대배경
1. 『만세전』시대배경인 1910년대의 시대상황-[무단통치기]
가. 우리나라의 시대상황
나. 일본의 시대상황
2. 『삼대』시대배경인 1920년대의 시대상황 - [문화통치]
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조선의 상황
나. 1920년대의 국,내외 독립운동 노선
다. 신간회의 결성과 활동
III. 소설분석
1. 만세전
가. 소설의 줄거리
나. 내,외적 분석
다. 타 소설과의 비교
2. 삼대
가. 소설의 줄거리
나. 내,외적 분석
다. 인물분석
IV. 결어
1. 만세전과 삼대 소설간의 연관성
2. 1920년대 민족운동의 분화와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3. 엽상섭에 대한 비판
본문내용

I. 작가소개
횡보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출생으로 서울 종로구 필운동 야 조현 고가나무골에서 태어났다. 자는 주상(周相)이고 본관은 파주(坡州)이다. 모친은 경주 김씨이며, 본명은 상섭(尙燮), 필명은 상섭(想涉), 횡보(橫步), 제월(霽月)이다. 8세 때부터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그는 1907년 11세에 관립 사범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 관립 사범학교에서 조선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또 이토 히로부미가 오는 날에는 전체 학생을 참가시키고 황제의 동적전 거행에는 반 대표만 보낸 것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이기봉, 최승만 등과 함께 보성 보통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1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고, 1912년 9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미 맏형 창섭, 둘째 형 명섭이 일본에 유학중이었다. 창섭은 유년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6개월간 일본어를 배웠다.
1915년 19세에 경도부립 제이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외국인으로는 유일한 학생이었으며 「우리집 정월」로 문장력의 칭양을 받기도 한다. 이때 맏형 창섭이 경도 주둔 제 16사단에 육군 중위로 근무하고 있있다.
1918년 2월 맏형 창섭이 이웅준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게 됨에 따라 동경유학생회에서 집단 항의를 하기도 한다. 3월에 경도부립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족 자제가 다니는 경응대 문과 예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한 학기만 마치고 10월 8일 병으로 자퇴했고,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여 대판 조일신문 서울 특파원을 지냈다.
1919닌 1월 『삼광』(三光) 동인이 되었다. 대판에서 국내의 3·1 운동 소식을 듣고 유학생 등을 규합하여 3월 19일 대판 조선노동자 일동대표 명의로 대판 천왕공원에서 거사하기로 했으나 3월 18일 밤에 피검된다. 대판 지방법원에서 금고 10월의 판결을 받았으며 6월 6일 무죄 판결을 받고 6월 10일 석방되었다. 옥중에서 대판 조일신문 주필에게 ‘어째서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라는 글을 써 보냈다.
1920년 2월 동아일보 기자로 취재활동을 개시하였고 3월에 서울에 돌아왔다. 경무국 출입기자 생활을 하다가 기자직을 사퇴하고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다.
1921년 5월에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탈고, 7월에 오산학교를 사퇴하고 귀경하여 『개벽』 8월호에 발표하였다. 1922년 26세에 육당 최남선이 주재한 『동명』의 편집을 맡았다.
1924년 첫 단편집 『견우화(牽牛花)』를 출판하였다. 시대일보 사회 부상 재직 중 휴간으로 사직하고 『폐허이후(廢墟以後)』를 간행한다. 1926년 30세때 도일(渡日)하여 일본 문단에 진출해 보려 한다. 동경 교외 일모리에서 도향(滔香), 노산(鷺山)과 기거하였다.
1928년 2월 다서 무애(無涯) 등과 합류하여 2년을 함께 지내다가 10월 22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매일신보에 「삼심(三心)」 을 연재하였다. 1929년 33세에 의성 김씨 영옥과 결혼하였다. 9월에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일을 보았고 10월에 조선일보에 『광분(狂奔)』을 연재하였다.
1932년 조선중앙일보에 『백구(白鳩)』를 연재했고, 이듬해에 조선일보에 『삼대(三代)』를 연재하였다(215회). 7월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매일신보에 장편 『무화과』를 『삼대』의 속편으로 집필하였다. 1934년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2월부터 『목단꽃 필 때』를 연재하였다.
1936년 매일신보에 『불연속선』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12월 30일 완결짓고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1937년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초빙되었다. 이어 1938년 4월 귀국하며 가족을 데리고 다시 귀임하였다.
1939년 6윌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하였다. 9월 만선일보 편집국장 자리를 사하고 만주의 안동으로 이사하였다. 1940~1945년 8월 15일까지 안동에 대동항건설주식회사 홍보담당 사원으로 종사하며 중류 이상의 생활을 유지하였다. 조국의 광복도 안동에서 맞았다.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었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불안과 공포가 심해져 신의주로 돌아왔다. 여기서 겨울을 나고 봄이 늦어서 38선을 넘어왔다.
1946년 50세에 경향신문의 창간과 함께 편집국장(당시 주필은 정지용)이 되었으나 1947년 경향신문사를 사퇴하고 성균관대학 강사와 창작에 전념하였다. 1948년 장편 『효풍(曉風)』을 자유신문에 연재하였고 단편집 『삼팔선』, 『해방의 아들』을 출간한다.
1950년 5월 장편 『난류(暖流)』, 『입하의 절(立夏의 節)』을 집필증 6·25 적치하의 서울에서 숨어 살았다. 9·28 수복이 되자 해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거쳐 소령으로 임관되었다. 당시 이무영과 윤백남과 함께였다.
1952년 1월 장편 『홍염(紅焰)』, 『새울림』을 집필하였다. 1953년 57세에 7월 휴전이 되자 서울에 돌아왔고 북아현동 1―267 질녀의 집에 세들었다. 해군 중령으로 제대하였다.
1954년 서울에서 문화상을 받았고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9월 한국일보 창간과 더불어 『미망인』을 집필하였으며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위병으로 계속 와병중이었다. 62년까지 60여 편의 단편과 5편의 장편을 집필하였다. 1956년 3월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57년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1962년 66세 되던 해 3·1문화상을 받았으나 병이 더욱 악화되어 1963년 3월 11일 메디컬센터
참고문헌

-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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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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