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토지_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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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1. 작가에 관하여
1-2. 작가의 생애
2. 작가의 작품세계
3. 작품
3-1. 초기의 단편 소설
3-2. 표류도
3-3. 김약국의 딸들
3-4. 시장과 전장
3-5. 토지
4. 마무리
본문내용
70년대 문학의 위대한 성취, 『토지』의 작가 박경리선생님



박경리(朴景利, 음력 1926년 10월 28일/양력 1926년 12월 2일 ~ 2008년 5월 5일)는 대한민국의 여류 소설가로, 본명은 금이(今伊). 출생지는 경상남 도 통영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 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 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 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 작하여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등을 발 표하고, 이어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에 25년간에 걸쳐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았다. 1979년과 1984년에 각각 한국방송공사에서, 2004년에 SBS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녀가 1980년부터 1994년 8월 15일까지 원주시 옛집에서 《토지》를 지은 일을 기념하기 위해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에 토지문학공원이 조성되었고,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있는 토지 문화관에서 집필생활을 하였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그 밖의 주요작품에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單層)》 《노을진 들녘》 《신교수의 부인》 등이 있고, 시집에 《못 떠나는 배》가 있다.


박경리의 아버지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네 살 연상의 어머니와 박경리를 낳았으나, 부인을 버리고 유랑 생활을 하며 이곳저것에서 새 가저을 만들었다. 그녀는 어머니 밑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모른 체 성장했다. 이러한 자신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 박경리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 이 허무한 세상에 왜 내가 태어났으랴하는 따위의 뜻은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의 관계에서 온 나의 견해였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 대해 타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적의의 감정으로 시종 일관했다. 어찌하여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미워한 여인에게 나를 낳게 했는가 싶다. 어머니는 말하기를 산신에게 빌어 꿈에 흰 용을 보고 너를 낳았으니, 비록 여자일망정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신에게 증오하고 학대하던 남자의 자식을 낳게 해 주십사고 애원을 한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그것은 사랑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은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못 박아 주고야 말았다. 그 신념은 무릇 강한 힘에 대한 반항이 되었고 그러한 반항 정신이 문학을 하게 한 중요한 소지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나를 고립시키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이런 성장과정을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했으나, 남편 김행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쟁 직후 아들을 잃었다고 한다. 남은 딸 김영주와 생활하면서 작품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김영주는 1973년 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원주시의 토지문화관 관장직을 맡고 있다.

2007년 7월말 폐암이 발견됐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2008년 4월 4일 뇌졸중 증세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 2008년 5월 5일 오후 2시 45분 경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경리의 사망 직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하였다.

** 참고자료 -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A%B2%BD%EB%A6%AC
http://100.naver.com/100.nhn?docid=703225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인복씨의 논문 ‘박경리 문학 연구’



박경리는 1955년에 문단에 데뷔한 이래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1969년부터 연재를 시작, 26년에 걸친, 4만 여장 분량의 '토지'는 박경리 개인에게나 한국문학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작품에 대한 여러 논의들, 즉 역사소설인가 아닌가가 문제시 되었다거나 농민소설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거나 총괄체 소설, 가족사 소설, 민족사 소설, 총체소설 등의 다양한 장르로 규정되어 온 것은 곧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서사구조, 다양한 층위의 세계가 중층적인 구조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토지'는 거대한 원고지 분량에 걸맞게 7백여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시간적으로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라는 한국사회의 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격동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동학혁명에서 외세의 침략, 신분질서의 와해, 개화와 수구, 국권 침탈,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광복에 이르기까지의 격동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종적인 축으로 하여 진주와 간도(만주), 경성, 일본 등으로 삶의 영역이 확대되고 윤씨부인과 최치수, 최서희로 이어지는 최참판댁과 연결되어 삶을 엮어가는 평사리의 주민들, 김길상이나 김환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에 투신하는 인물들, 최참판댁의 전이과정 속에서 부침하는 신지식인들 등 수백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다.

박경리의 문학은 전반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소외문제, 낭만적 사랑에서 생명사상으로의 흐름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 생명사상이 종합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바로 '토지'이다. 박경리에 의하면 '존엄성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가장 숭고한 것을 지키는 것'(파시 제1권, 131면, 1993)인데 박경리는 그의 작품에서 이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생명본능 이상으로 중요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토지'의 주인공 서희는 바로 이 존엄성을 지키려는 가장 강한 의지의 인물로 등장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에 있어서 존엄성의 문제는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기존의 관습과 제도 및 권력과 집단에 대한 비판, 욕망의 노예가 되어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들에 대한 멸시와 혐오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존엄성을 상실할 때에 바로 한이 등장하는 것이며 이 한을 풀어가는 과정이 곧 박경리 문학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토지'를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생명사상은 바로 이 존엄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박경리는 성장의 체험을 통하여, 자기 의식을 소유하지 않은 삶은 허망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세상의 인습에 얽매여 산다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 한 인간의 선택과 결단의 결과로 자신의 삶이 꾸려지지 않은 경우,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행복감마저도 불행일 뿐이라는 것, 이것은 남편을 붙잡아 두려한 어머니가 역설적으로 알려주었다. 이는 사랑을 구걸한 어머니와 어머니에게 혹단한 채찍을 내렸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랑의 본질이란 <자기자신의 의식을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의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망각하고 동시에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획득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의식이 원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회적 격변에 몸 닫지 않는 경우, 그것은 곧 고독이었고 불행이었으며 죽음이었다. 때문에 자기 의식에 강렬한 열망은 사회로 향하지 않고, 대신에 사랑으로 향한다. 때문에 박경리의 소설에는 낭만적 사랑과 좌절을 다룬 소설이 많다. 『가을에 온 여인』,『노을 진 들녘』, 『영원한 반려』, 『단층』, 『성녀와 마녀』등이 직접 이 문제를 다룬 소설이거니와 , 이외의 다른 소설에도 이 주제는 반드시 끼여 있다.
이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은 여성억압적 현실에도 눈돌리게 한다. 작가는 여성인 어머니를 억압하는 남성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억압-피억압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한 인간의 운명을 불행한 것으로 만드는지를 확인했고, 이를 계기로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구조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박경리는 아주 일찍부터 여성문제를 다루는 작가가 될 수 있었고, 이러한 관심은 그의 초기작「전도」에서부터『표류도』, 『김약국의 딸들』, 『파시』등의 성과로 산출된다.
그리고 성장기의 체험은 작가의 인식구조를 회의주의자의 그것으로 결정짓는다. 작가는 일찍부터 한 인간에 대한 기대와 배반을 맛보았다. 또는 웃음 속에 감추어진 악마의 형상을, 권위 속에 비어 있는 자기기만의 얼굴을 경험했다. 이것은 작가를 회의주의자로 만든다. 성장기의 경험내용으로 인해 어떤 삶이 더 진정한 삶인가, 어느 것이 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인가,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가라는 질문을 화두처럼 달고 다녔다. 박경리의 한 대상 혹은 인물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는 지나치리만큼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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