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 발해의 건국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9.08.03 / 2019.12.24
  • 6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1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목차
Ⅰ.머리말
Ⅱ.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Ⅲ.발해의 건국과정
Ⅳ.발해의 건국집단과 주민구성
Ⅴ.맺음말
본문내용
Ⅰ.머리말

7세기는 동아시아 세계가 국제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격동의 시기였다. 중국대륙에서 수를 대신한 당이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으며, 한반도와 요동지방에서는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데 이어 발해가 건국되었다.
7세기 동아시아 정세는 당 내부의 상황 변화와 주변 이민족의 성장과 결집이라는 두 가지 요인 아래 조성되었다. 7세기 후반 당 내부에서는 측천무후에게 모든 실권이 넘어간 시기이다. 측천무후는 권력을 장악에 주력하여, 외부로의 팽창을 도모하거나, 이민족 세력의 성장을 저지할 겨를이 없었다. 당 내부의 상황이 이와 같이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주변 이민족 세력들은 자체 성장과 결집을 도모하여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발해국은 698년 고구려 유민의 부흥의지와 당시의 국제질서를 이용하여 새롭게 탄생한 왕조였다. 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발해가 건국될 수 있었던 것은 거란 ‘이진충의 반란’(696)을 비롯한 당 내부의 정치문제, 그리고 돌궐 등을 비롯한 국제 환경이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의지와 대조영의 지도력이 큰 몫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발해가가 한국사의 영역이란 사실을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런 통념은 비단 중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발해사 연구에 이용되는 자료들이 발해의 건국 시조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 서로 상반되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데에서 주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발해사 연구는 주로 발해의 건국과정, 그것도 건국시조인 대조영의 출신문제에 집중해 왔다. 이 문제가 바로 발해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는 핵심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발해의 건국과정과 건국집단의 세력을 살펴보며 우리역사에서 발해 의 위치와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Ⅱ.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700년을 이어온 고구려는 멸망했다. 고구려를 점령한 당나라는 고구려의 영역을 9개 도독부, 42개 주(州), 100여 개 현(縣)으로 나누었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설인귀에게 책임을 맡기고, 그 밑에 현지인을 도독․자사․현령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기본적으로 현지 유력자의 지배기반을 축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유민들에 의한 고구려 부흥운동은 안승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과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으로 대표된다. 670년 설인귀가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출정한 틈을 타 검모잠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평양성에서 일어난 검모잠은 신라로 간 안승을 맞아 왕으로 옹립한 뒤 한성(지금의 황해도 재령)을 근거지로 항쟁을 벌였다. 이어 요동지역의 안시성과 부여성에서도 반당투쟁이 발발했다. 이 무렵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는데, 그것은 당이 옛 백제 지역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흥 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고, 당이 요동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672년 일어난 백수산 전투와 673년 일어난 호로하 전투에서 연합군이 당군에 패배함에 따라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잦아들게 되었다.

하지만 당은 매초성전투(675)와 기벌포전투(676)에서 신라에게 패한 후, 안동도후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다. 이로써 당은 패수 이남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부터 당의 고구려 지역에 대한 지배는 요동반도에 한정되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고구려 건국사` 를 읽고
  • 우리 역사의 이해(『고구려 건국사』를 읽고)『고구려 건국사』를 읽고4년 동안 대학에서 역사학을 배우며 고구려 건국에 대한 강의는 정말 많이 들었다. 한국사 교수님께서 고대사 전공이셨고 특히 고구려, 백제와 발해연안의 발굴을 많이 하신 분이였기 때문에 한국사 전공 수업의 대부분은 고구려, 부여의 강의가 많았다. 물론 건국 신화에 대한 것도 강의와 시험공부를 통해 많이 배워왔었다. 하지만 이번 우리역사의 이해에서 ‘고구려 건국사’

  • 한중일간 역사분쟁
  • 임상선 윤휘탁 공저(동재)동북공정과 고대사 왜곡의 대응방안2006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백암)동아시아의 역사분쟁2007 송기호(솔출판사)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2008 현대송 (나남)역대정부의 독도정책 고찰 2008.9.19 나홍주 (흥사단 독도연구회 회장, 前독도조사연구학회 회장)독도의병대홈페이지 http://www.o-dokdo.com 독도본부 홈페이지 http://www.dokdocenter.org반크 홈페이지 http://www.prkorea.com/start.html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http://www.historyfoundation.or.kr/

  • 한국 신화의 정체성을 밝힌다
  • 한국신화의 정체성이 마당의 주요 요지는, 건국신화(단군 신화, 주몽 신화, 박혁거세 신화, 김수로 신화)와 무속신화(전국 각 지역에서 전승되는 수십 종의 유형)를 중심으로 동북아 신화와의 비교이다. 동북아 아시아 신화 속에서 알 수 있는 점들을 보면, 먼저 한국건국신화에서 파악되는 신성혈통은 천부지모, 일부월모, 천부수모 등으로 다양하게 논의될 수 있으나, 태양과 불과 남성을 양의 축으로 음양의 결합으로 만물이 탄생 된다는 사고로 집약

  • 고려시대의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 한국사상사학회, 1987, 113쪽.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 신이한 면을 부각시켰으며 이것은 몽고의 간섭기라는 국가의 혼란시기에 민족의 자주성과 문화적인 우위성을 내세우면서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역사를 삽입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의 시작이 중국의 것에 결코 뒤쳐지지 않음을 나타내었으며 이러한 바탕에서 당시의 상황에 몽고의 지배에 놓여있지만 문화적으로 우수한 우리 민족이 그들의

  • [한국고대사]대가야의 성립과 발전
  • 한국사 인물 실록』, 문예마당3. 김태식, 1993,『가야연맹사』, 일조각4. 김태식, 2002,『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1권)』, 푸른역사, 83~129쪽 참조5. 노중국, 김세기, 이희준, 주보돈, 『대가야 들여다보기』, 서울기획, 2006, 91~94, 100~117쪽 참조6. 매일신문 특별취재팀, 2005, 『(잃어버린 왕국)대가야』, 창해7. 박창희, 2006,『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 이른아침8. 백승충, 2001, 『한국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79~130쪽 참조9. 백승충, 2006, 『대가야의 건국과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