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대한제국은 왜 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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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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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1) 원수부 신설과 군부개편
(2) 중앙부의 증강
1) 무관양성기관 설치
2) 시위대의 강화
3) 친위대의 증강
4) 호위대
(3) 지방군의 증강
1)진위대와 지방대의 강화
2)포대의 증설
(4) 일제의 군대해산

2. 대한제국의 외교정책
(1) 중립론
1) 중립론의 시작
2) 칭제에 담긴 외교적 의미
3) 대한제국의 중립론
(2) 대한제국의 삼국제휴 논의
1) 삼국제휴론
(3)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의 결론

3. 일본의 정세
(1) 일본의 대청·대러 정책
(2) 청일전쟁
1)청일전쟁의 개전
2)청·일 강화
(3) 러일전쟁
1) 시아의 만주 점령과 일본의 대응
2) 1901년 3~4월의 위기와 영일동맹결성
3) 러시아 고립과 일본의 대러개전
4) 전쟁의 추이와 포츠머츠 조약
5) 을사보호조약
6) 제1회 러일 협약
7) 제 2회 러․일 협약 과 일본의 한국 병합

4. 러시아의 정세
(1) 대한제국과 국제정세
(2) 러시아, 미국, 영국과 대한제국
1) 러시아의 대한제국 외교정책
2) 미국의 대한제국 외교정책
3) 영국의 대한제국 외교정책
(3) 우리들만의 역사가 아닌 세계사적 접근의 당위성

5. 청나라의 정세
(1) 청일전쟁
1) 청일전쟁의 배경
2) 전쟁 경과
(2) 시모노세키 조약

본문내용

1.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군사제도(軍事制度)

아관파천기에 군사력 증강에 관심을 보인 고종(광무황제)은 1896년 10월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러시아식 군사훈련에 의해 800명 규모를 양성한 바 있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1897년 2월 조선의 군인은 대략 4천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규모였으니, 대한제국 성립 이전의 한국 군대는 외국 침략에 대비하기는커녕 국내 치안도 담당하기에 부족한 실정이였다.
한편 일본의 경우는,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와 대결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군대 확충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해군 증강에 힘을 쏟아 1896년 당시 전함 3척과 비무장 순양함 12척이던 수준을 10년 안에 103척의 함정을 보유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 육군은 청일전쟁당시 13여 만명의 규모였다. 1895년 가을부터 전력 증강에 들어간 일본육군은 평시 15만명, 전시 60만명으로 전쟁 수행력을 군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1897년 한국이 800여 명의 군인을 증강한 것에 비해 일본은 2개 사단 4만여 명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1) 원수부(元帥府) 신설(新設)과 軍部 改編(군부개편)

대한제국 성립 후 1899년 6월 황제권을 강화를 위해 고종은 먼저 군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해 광무 3년(1899)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궁성 내 설치한 원수부는 국방, 용병 및 군사상의 각종 명령을 장악하고 군부 및 중앙과 지방 각 부대의 지휘와 감독을 장악하는 등 군사상 최고기관 이였다. 원수부는 국방 및 작전계획, 군대편성, 군대교육, 부대검열, 군인상벌, 존안, 회계 등에 걸치는 광범위한 기능을 가졌다. 원수부의 핵심부서는 군무국과 검사국이다. 군무국은의 주요 사무는 군사에 관한 조칙과 공문을 군부와 중앙 및 지방 각 부대에 발포하고 이들의 일기와 보고를 접수하여 개략을 초록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사항 등 이였다. 검사국에서는 매일 시위대에 속한 장교 중 1인을 위임하여 궁성 호위병과 중앙 및 지방 각 부대를 시찰케 하고 심사 보고서를 원수인 황태자를 경유한 후 대원수인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후 군사정책과 집행은 군령기관인 원수부와 군정기관인 군부의 이원화 체제로 되었다.


(2) 중앙부(中央部)의 증강(增强)

1) 무관양성기관 설치
조선정부는 신식화된 근대적 군대를 지휘할 유능한 초급장교의 양성이 시급한 과제임을 인식하고 마침내 건양 원년(1896)에 ‘무관학교관제’를 반포하였다.
이 육군 무관학교는 본격적인 초급장교 양성만을 위하여 조선이 외국 군사교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세운 최초의 전문적인 무관 양성기관 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무관학교는 융희 3년(1909)까지 존속되었는데, 실제로 무관학교로의 기능을 발휘한 기간은 광무 2년(1898)부터 광무 8년(1904)까지라 할 수 있겠다. 광무 8년 한이의정서가 체결되고 융희 1년(1907) 한국군이 해산된 이후에는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했다.

2) 시위대의 강화
자주자립의 의지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정부는 중앙군을 더욱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대한 제국은 먼저 황제 호위부대인 시위대를 확충 강화했다. 즉 광무 2년(1898) 시위 제 1·2대대를 합쳐 시위 제1연대로 편성한 것이다. 이듬해 12월에는 시위대에 포병 1개 중대를 배속시킴으로써 수위대의 전력을 크게 증강 시켰고, 이 포병중대가 다시 포병대대로 증편되면서 전투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황제의 시위대는 보병 2개 대대, 포병 1개 대대, 그리고 기병1개 대대 등 그 화력이나 기동성이 증강된 명실상부한 중앙 친위군으로 개편되어 황제권 호위를 담당하였다. 특히 같은 중앙군인 친위대와는 표리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편성 및 훈련 등의 제반사항이 친위대는 물론 지방군인 지방대와 진위대에 표준이 됨으로써 대한제국 전군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시위대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하여 창설된 이래, 최초의 러시아 군제를 수용하여 편성 훈련된 정예부대로서 중앙군의 주력이 되었다.

3) 친위대의 증강
시위대가 증강됨에 따라 수도방어의 책임을 지고 있던 친위대도 상대적으로 시위대 편제에 의하여 강화되었다. 즉 광무 2년(1898) 친위대대도 시위대의 편제에 따라 친위연대로 개편되고, 시위연대에 포병대대가 증설 배속되었으며, 이들은 각각 3개 소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는 병영건설이나 군수물자 운송 등의 임무를 담당했고, 총병력은 3,400명으로 편성되었다.
광무 6년(1902) 10월에는 시위대와 같이 친위대도 2개 연대로 증편되었으나 이때부터 일제가 본격적으로 강압을 가해오던 때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실효성을 거두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이후로 친위연대는 별다른 병화가 없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규모면에서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정예화 되면서 편제상으로 4천여 명 병력을 유지함으로써 시위대와 함께 중앙군의 부력부대가 외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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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열강의 동아시아정책』, 일조각, 1979
『두산 백과사전』, 두산동아, 1996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Sears Roebuck, 2004
김홍 편저, 『한국의 군제사』, 학연문화사, 2001
장석홍, 『대한제국의 명망 과정과 동북아시아 질서의 재편』, 2007
최문형, 『러시아 남하와 일본의 한국 침략』, 지식산업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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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42대한제국)』,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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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twt***
    (2014.04.30 0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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