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보길도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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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답사를 떠나며
2. 윤선도에 대하여
<고산의 사상>
(1)불교적 작품
(2) 도가적 작품
(3)유교적 작품
<2> 윤선도의 정신적 지향과 시 세계
<3> 문학세계
3. 해남 녹우당
4. 보길도와 윤선도
보길도의 고산 유적지
강 진
1>다산 유물전시관
2>다산초당(茶山草堂)



본문내용
여행은 일상의 괘도에서 이탈하고픈 충동의 실현태이다. 또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이완과 긴장의 연속선에 놓인 또 다른 괘도이다. 그리고 답사는 길 떠나는 자의 눈과 발에 저마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담을 수 있는 특별한 장치를 하고 떠나는 지적 유희이다. 그래서 답사 목적지는 지적 갈증을 마음껏 풀 수 있는 곳이면 그 어디라도 좋다. 하물며 마음이 같은 이와의 떠남은 이미 떠남 그 자체가 아름다운 지적 유희이다. 게다가 답사 길에 만날 비취빛 머금고 사는 이들을 만난다면 이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있을까.
해남 땅으로의 여행, 거기서 만날 녹우당, 미황사, 그리고 보길도, 다산 초당, 영랑 생가... 특히 해남 보길도. 땅끝마을에서 노화도를 거쳐 한 점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유토피아. 그리고 그 지상낙원을 건설한 고산 윤선도. 보길도는 이번 답사에서 우리가 지적 유희를 즐길 곳이며, 고산은 우리에게 지적 유희를 제공해줄 인물이다.
장마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해가 눈부시다. 이제 푸른 하늘로 터져 나오는 태양을 손으로 가릴 것인가, 아니면 온몸으로 맞설 것인가. 가슴으로 터져나오는 길 떠남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은 손으로 태양을 가리는 일과 같으니, 지적 유희에 목마른 자들, 길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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