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전투] 임진왜란 전투의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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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이 글은 임진왜란 전투에 대하여 그 동안에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해 봄으로써 임진왜란 전투의 실상에 대하여 더욱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목차
서론- 본론- 결론 의 3단 구성으로 서술하였습니다.
본문내용
임진왜란 전투의 실재

수군의 전투력과 함께 해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선의 성능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수군이 패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전투용 선박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섬나라이면서도 예부터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일본은 수송용 선박을 개조하여 전선으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전선으로서의 기능은 취약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일본수군의 관선은 선체가 좁고 길어서 안정성이 없는데다가 매우 허약하였다. 반면 조선이 보유하고 있던 크고 무겁고 튼튼한 전함 판옥선은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기 어려운 반면 탑승한 수군이 아래를 내다보며 화포를 발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수군의 전통적 전법이었던 선상에 기어오른 후, 육탄전을 벌이는 전법도 불가능 하게 되었다. 이렇듯 양국 수군의 전선의 성능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고, 이러한 차이는 임란 해전에 있어서 조선수군의 결정적 승전 요인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두 나라의 전선의 구조의 차이와 함께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함재화력의 차이이다. 일본은 원래 조선처럼 화포를 선호하지 않고 소총만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 임진왜란에 있어서도 화포를 별로 이용하지 못하였고, 그들의 군선들도 포술에는 아주 약했다. 반면 조선의 화포는 ‘부딪치는 것은 다 절단 한다’고 표현했을 만큼 위력적 화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곡사포를 탑재, 운용하는 등 일본에 비하여 막강한 함재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 일본 측 연구학자들이 일본이 화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임진왜란의 결정적 패인의 하나라고 말했을 만큼 화포의 존재는 조선수군의 전력증강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판옥선을 개조하여 제작한 특수전선 거북선이 일방적인 위력을 발휘한 것에 대한 사실은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비록 전투원과 탑재한 화기들이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기습적인 선제 돌격기능을 하였던 거북선 이었지만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격군과 전투원을 모두 개판 밑에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전투 활동에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었고, 선봉에서의 격렬한 돌격작전 수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전에서의 피해도 판옥선에 탑승한 군사에 비해 사상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거북선은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닌 전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북선의 전투력이 조선수군의 주된 승리요인이라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에게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주된 승리요인을 지적하자면, 연해지역 총동원체제하의 수군제도 와 일본전선에 비해 월등한 성능을 가졌던 전선의 활약, 그리고 강력하고 위력적인 함재화력의 보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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