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 조선후기 불교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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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조선후기 불교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Ⅰ. 머리말
Ⅱ. 조선후기의 불교
1) 조선전기의 억불정책
2) 조선후기의 불교계의 동향
(1) 억불정책과 호국활동을 통한 대응
(2) 사원의 어려움과 그 극복
(3) 개화운동과 승려의 현실참여
3) 학문적 경향
(1) 승단 내의 수학경향
(2) 강경과 승려문집의 성행
(3) 삼종선 논쟁
Ⅲ. 조선후기의 민간신앙
1) 조선초기의 민간신앙
2) 조선후기의 민간신앙
(1) 도교신앙
(2) 도참사상
(3) 미륵신앙
(4) 마을신앙과 개인신앙
(5) 조선후기 사회에 민간신앙이 미친 영향
Ⅳ. 끝내는 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
조선을 건국한 지배층은 성리학(性理學)을 내세우고 유교정치의 기틀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들은 유교윤리와 배치되는 신앙과 종교는 모두 배제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성리학적 지배이념은 아직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보급되지 않았으며, 불교 ․ 도교 ․ 민간신앙 등은 오랜 전통과 종교적인 욕구로 여전히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었다. 불교는 사후의 명복이나 현세의 구복이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종교적인 기능을 해오고 있었으며, 국가차원에서 삼국이래로 호국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이 비록 유교국가를 지향하고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였지만 유교적인 의례만으로는 불교의 호국적 기능과 종교적인 기능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유교의 합리주의에 의거하여 도교나 민간신앙의 기관과 의식을 혁파하였지만 천재지변의 재난을 당했을 때 유교의 합리주의만으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일반 백성들의 의식 속에 강인하게 존속되어온 전통적인 민간신앙적 세계관은 일시에 배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조선 초기의 억불정책에 대응한 불교계의 동향과 민간신앙의 흐름을 알아봄으로써 조선 후기의 사상적 측면에서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조선후기의 불교
1) 조선전기의 억불정책
조선왕조 개창 직후 건국 주도 세력들은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열의에 불탄 반면, 고려사회를 이끌어온 구질서로서의 불교는 철저히 타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策政策)은 조선조 오백년의 일관된 정책이었다. 호불군주(護佛君主)였던 세조대를 제외하면 태조 대에서 중종 대까지 억불책은 단계적으로 그 강도를 더해갔다. 승려수와 사찰수를 대폭 감축하였으며, 사원소유 토지와 노비를 상당부분 국고로 귀속시켰다. 도첩제(度牒制)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 봉쇄하였으며, 3년마다 시행하던 승과를 철폐하여 불교종단을 해체하였다. 종단은 조선 초만 하더라도 11종이었는데. 태종대에 7종으로 줄고 다시 세종대에 선(禪) ․ 교(敎) 양종으로 줄었다가. 마침내 중종 대에는 종단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승려의 신분도 하락하여 고려시대에 누렸던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박탈당한 체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다. 그 중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한 조치는 가장 상징적인 억불정책이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4, 2003
남동신, 朝鮮後期 불교계의 동향과 《像法滅義經》의 성립, 2001
강만길외 공저, 한국사 8, 한길사, 1994
강민길외 공저, 한국사 10, 한길사, 1994
서울신문, 백승종의 정감록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사건
불교문화 연구원, 한국미륵사상 연구, 동국대학출판부, 1987
이이화, 역사 속의 한국불교, 역사비평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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